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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6 (토)

의사들이 돌아왔다, 공공병원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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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개혁, 이제부터가 중요] [7] 정원 90% 넘긴 서울 서남병원

조선일보

2일 서울 양천구 서울시립 서남병원 응급실에 모인 ‘신입’ 의사들. 왼쪽부터 전병두 이비인후과 과장, 신용호 응급의학과 과장, 표창해 서남병원장, 손민정 신장내과 과장, 이용대 감염내과 과장, 박준석 심장혈관흉부외과 과장. 올 들어 이 병원에는 이들을 포함해 14명이 새로 입사했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의사가 합류한 것은 2011년 개원 이후 처음이다. /김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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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정형외과가 밤 8시까지 하더라고. 요즘 대학 병원은 두세 달은 기다려야 하는데 바로바로 진료받을 수 있어요. 아플 때마다 옵니다.”

2일 오후 서울 양천구 서울시립 서남병원. 80대 노인이 보행기를 끌고 들어오며 말했다. 전공의 파업으로 한산해진 대학 병원과 달리 이곳 시립병원은 환자들로 북적였다.

병원 입구에는 ‘서남병원 신규 의료진을 소개합니다’라고 쓴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감염성 질환 전문가’ ‘척추 질환 차세대 명의’ 등 문구와 함께 의사 얼굴 사진을 붙였다.

서남병원은 2011년 문을 연 시립병원이다. 병상은 295개. 소화기내과와 외과, 재활의학과 등 18개 과에 의사 50명이 일하고 있다. 응급실도 갖추고 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의사를 구하지 못해 쩔쩔매던 곳이다. 정원의 80%를 겨우 채웠다. 그런데 올해는 전문의 14명 영입에 성공했다.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의사가 입사한 것은 개원 이후 처음이다. 특히 ‘의료 대란’으로 24시간 비상이 걸려 있는 응급의학과에 6명이 합류했다. 서울시와 의료계에서는 “의사들이 외면하던 공공 병원에 ‘기적’이 일어났다”는 말이 나온다.

서울의 시립병원은 총 12곳이다. 이 중 9곳이 만성적인 ‘의사 부족’ 문제를 겪고 있다. 연봉이 민간 병원의 절반 수준이고 의료 시설도 충분치 않아 의사들이 기피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서울시립 서북병원과 은평병원은 지난 5월 기준 의사 정원을 60%도 채우지 못했다. 서북병원은 올해 상반기 의사 10명을 구하기 위해 7번 공고를 냈지만 4명밖에 못 뽑았다. 은평병원은 작년에 6명을 뽑으려고 9번 공고를 냈지만, 아무도 채용하지 못했다.

지난 2월 전공의 파업 이후 서울시가 시립병원 의사 연봉을 민간의 60~70% 수준으로 올리면서 변화의 단초가 마련됐다. 신입 의사들은 “연봉은 민간에 비해 적지만 뜻 맞는 동료들과 내가 원하는 ‘진짜 의술’을 펼칠 수 있을 것 같아 도전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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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백형선


작년 10월 취임한 표창해 서남병원장은 그해 11월부터 ‘전문의 모시기’에 열을 올렸다. “처음 병원에 와보니 밤에 응급실에 환자가 없었습니다. 직원들이 ‘의사가 부족해서 밤에 온 환자들을 그냥 돌려보냈더니 어느 순간 환자가 끊겼다’고 하더라고요. 충격을 받았습니다.”

표 원장은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대학 선후배는 물론이고 사돈의 팔촌까지 전화를 돌렸다”고 했다.

지난 2월 전공의들이 파업에 들어가자 대학 병원 진료가 막히기 시작했다. 시립병원으로 급한 환자들이 몰렸다. 시립병원은 대부분 전공의가 없어 파업 영향 밖에 있다. 서울시는 의사를 충원하기 위해 연봉 기준을 깨고 병원장에게 협상권을 위임했다. 그렇게 민간 병원의 60~70% 수준까지 연봉을 맞춰줄 수 있게 됐다. 신원 조회 등 두세 달씩 걸리던 ‘공무원식’ 채용 절차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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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서울 양천구 서울시립 서남병원에서 의료진이 회진하는 모습. 왼쪽부터 조영규 공공의료본부장, 표창해 원장, 이재순 간호부장, 최명원 간호파트장. /장련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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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전화가 하나둘 오기 시작했다. 표 원장은 이들을 직접 설득했다.

“평소 받으시던 만큼 월급은 못 드리지만 여기선 소신껏 진료할 수 있습니다. ‘수액 영업’ ‘비싼 약 처방’ 일절 안 하셔도 됩니다. 의료 소송도 전혀 걱정하지 마세요. 병원에서 다 대응하겠습니다. 선생님은 그냥 선생님 일만 하세요.” 이 말에 일하기로 결심한 의사가 14명이다.

덕분에 서남병원은 순식간에 의사 정원의 90%를 채웠다. 덩달아 환자도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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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오후 서울 양천구 서남병원에서 조영규 본부장과 간호사가 환자를 돌보고 있다. /장련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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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일 서남병원에 새로 합류한 의사들을 만났다. 이들은 “원하는 진료를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병원 수익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의학적 판단과 소신에 따라 환자를 볼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경기도의 한 종합병원에서 일했던 신용호 응급의학과장은 ‘사람 살리고 싶어 응급의학과를 선택한 것 아니냐. 같이 사람 살려보자’는 표 원장 말에 울컥해 올해 1월 합류했다. 신 과장은 “민간 병원에선 환자가 CT나 MRI를 많이 찍어야 인센티브가 나오기 때문에 의사가 ‘영업’을 해야 하는데, 공공병원은 그런 부담이 없다”고 했다. 그는 지난달 다른 병원에서 받아주지 않아 ‘응급실 뺑뺑이’를 돌다가 찾아온 노숙인을 치료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분의 완쾌한 뒷모습을 보며 대학 시절 꿈꿨던 진짜 의사가 된 것 같았습니다. 보람찼어요.”

박준석 심장혈관흉부외과장도 “‘돈 되는 환자’ 위주로 진료해야 하는 우리나라 의료 현실에 무력감을 느꼈다”고 했다. 박 과장은 서남병원 입사 면접 자리에서 “저는 돈 되는 심혈관 수술을 하러 온 게 아닙니다. 다른 병원에서 안 받아주는 난치성 폐질환 환자를 보고 싶어요”라고 못을 박았다고 한다. 그는 현재 그 희망대로 중증 폐질환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이비인후과 전병두(81) 과장은 서울 사당동에서 47년간 개인 병원을 운영했다. 현재 서남병원 최고령 의사다. 그는 “이제 은퇴하고 유튜브나 보면서 쉬려고 했는데 ‘47년 돈 잘 벌었으면 이제 봉사 좀 하라’는 친구 말에 머리를 탁 맞은 느낌이 들었다”며 “서남병원에 6년간 이비인후과가 없었단 소문을 듣고 힘을 보태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의사들은 의료 소송 부담이 적은 것도 시립병원의 장점이라고 했다. 전병두 과장은 “요즘 ‘의료 소송 내겠다’고 하는 환자가 많다 보니 의사들이 자연스레 몸을 사리고, 까다로운 환자는 다른 병원으로 보내는 분위기”라며 “병원이 소송 문제를 책임져주면 더 적극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고 했다. 서남병원은 의료 분쟁 전담 직원을 두고 있다. 손해배상금도 병원이 책임진다. 민간 병원과 달리 진료 일정이 빡빡하지 않다 보니 의료 사고가 날 확률도 낮다.

표 원장은 “그간 의사가 부족해 응급실도 제대로 운영할 수 없었던 병원이 이제는 ‘야간에도 환자를 잘 받아주는 병원’으로 소문이 났다”며 “직원들도 똘똘 뭉치고 있다”고 했다.

의사들을 만나고 나오는 길에 병원 건물을 되돌아보니 ‘건강 백년을 선도하는 시민의 병원’이란 문구가 보였다. 그들이 마치 ‘어벤저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종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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