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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8 (월)

힘자랑은 진보의 가치도 수단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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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이 엄청난 호조건 속에서도 어이없게 정권을 넘겨준 이유는 간명하다. 요컨대 진보 인프라의 구축과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정치적으로 활성화시키는 비전이나 담대함의 부족이다. 지금까지 검증된 진보의 성공문법은 약자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고, 그들의 사회적·정치적 힘을 강화시키는 것뿐이다.





한겨레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2022년 3월10일 “모든 것은 다 저의 부족함 때문이다. 여러분의 패배도 민주당의 패배도 아니다. 모든 책임은 오롯이 저에게 있다”며 패배를 선언한 뒤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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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직전 인터뷰에서 의미심장한 얘기를 꺼냈다. 그는 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의 민주당 승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것이 우리의 당연한 승리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야말로 일회적인 승리이지요, 의외의 승리.” 승인으로는 1997년의 경우엔 보수의 분열, 2002년 대선의 경우 호남정당의 영남 후보라는 조건을 거론했다. 진보정당이 자기 실력으로 승리한 게 아니라는 고백이다.



빗대 보면, 2017년 대선에서 민주당이 승리한 것도 그 직전의 대규모 촛불시위와 현직 대통령 탄핵이라는 예외적 상황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란 가정도 가능하다. 그렇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민주당은 야당 때 시대 흐름에 조응하는 정책, 즉 평화·민주·복지를 착실히 준비했고, 집권 후엔 최선을 다해 추진했다. 그 결과 선거 때마다 후보단일화나 정당연합 등의 방식을 취하던 익숙한 수세에서 확연하게 탈피했다. 민주정부의 성과에 보수의 퇴행이 더해져 이제는 진보의 약우세가 안착되는 흐름이 확연하다.



그런데 민주당에 당혹스러운 건 이런 질문이다. 2002년 대선 후에 차떼기 등으로 인해 보수정당이 사실상 궤멸되다시피 한데다 탄핵 역풍으로 2004년 총선에서 최초의 의회 권력 교체도 이뤄냈는데 2007년 대선에서 대패했다. 보수정당은 2017년 탄핵으로 또다시 붕괴 수준의 타격을 입었다. 지방선거·총선에서 연승했음에도 2년 뒤 대선에서 5년 만에 정권을 내줬다. 도대체 왜?



노무현 정부는 경제성적도 나쁘지 않았고, 정치개혁도 이뤄냈다. 따라서 실정에 따른 심판론은 의도된 가짜뉴스다. 사회경제적 기반을 넓히고 다지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대학 나오고, 괜찮은 직장에 다니는 중산층 또는 중상류층이란 ‘울타리 안’ 사람들의 목소리에 적극 호응하고, ‘울타리 밖’의 사람들은 무심히 외면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독일, 스웨덴 등 북유럽 복지국가나 미국의 뉴딜체제는 공히 노동의 사회경제적 힘을 강화시켜주고, 그 힘이 정당을 통해 정치적으로 표출되는 방식으로 건설됐다. 민주당 계열의 정당들은 대신 국민경선 등 포퓰리즘으로 국면적 위기를 돌파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불평등 해소보다 공평한 기회를 더 강조했다. “시민의 삶은 정치의 원천이다.”(샤츠슈나이더) 약자들이 고단한 삶에서 정치의 효능감을 느끼게 하면서 유권자-정당 간 연계를 굳건히 하고 확장하는 대신 왜소화의 길을 택했다. 그랬기에 탄핵 등 보수의 전방위 공세에서 대통령을 구해냈던 그 국민이 대선에서 등을 돌린 것이다.



2022년의 패배도 같은 맥락의 반복이었다. 약자의 삶을 개선하는 데, 그들에게 더 많은 사회적·정치적 권력을 부여하는 데에 주력하기보다 울타리 안의 사람들이 신경 쓰는 어젠다에 집중한 결과였다. 코로나 위기에 자영업자, 비정규직·플랫폼 노동자 등 약자들에게 더 많이 더 다양하게 지원했더라면, 경제지표보다 금융을 통한 부동산 관리에 더 많은 신경을 썼더라면, 사회경제적 이슈에 집중하는 입법정치를 펼쳤더라면, 검찰개혁 프레임에 갇힌 채 불필요한 자극과 오판으로 ‘그’를 키워주지 않았더라면 대선 승패와 이후의 정치가 많이 달랐을 것이다. 특히 집값 상승은 보통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자 정치적 외면으로 받아들여졌다. 결국 주어진 권력을 누굴 위해 쓸 것인지, 권력으로 보통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을 것인지에 대한 이해와 정책, 그리고 용기가 부족했다.



진보의 눈에는 말도 안 되는 악당인 트럼프가 2016년 대통령이 되고, 4년 뒤 다시 대통령직을 손에 쥔듯한 인기를 누리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토머스 프랭크가 통렬하게 비판했듯이 미국의 진보정당은 클린턴 8년, 오바마 8년 동안 허송세월했다. 재임 시절 경제도 좋았고, 인기도 높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표를 준 노동자, 흑인 등 약자들의 삶을 바꿔놓지 못했다. 희망고문, 배신감에 따른 분노가 인종주의와 결합해 지금의 트럼프 현상을 낳고 있다. 다시 말해, 트럼프 현상은 진보 무능의 백래시로 등장했다.



강준만이 ‘싸가지 없는 진보’를 출간한 해가 2014년이다. 그는 ‘싸가지 결핍증’이 진보의 무덤이고, 진보정치세력의 최대 약점이라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싸가지는 예절이나 버릇이라기보다는 인간관계에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거나 그 밖의 무례, 독선, 오만, 도덕적 우월감 등을 지적할 때 쓰는 말이다. “그렇다. 스스로 잘난 척하는 우월감이 문제다. 우월감이야말로 ‘싸가지 없는 진보’의 동력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달라졌을까? 그래 보이지 않는다. 팬덤의 박수를 무능과 나태의 방패로 삼고 있다.



미국의 양극화와 트럼프 현상을 설명하면서 비슷한 주장이 제기됐다. 미국의 진보가 노잇올(know-it-all), 즉 자신을 남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적 오만함이 원인이라는 얘기다. “태도는 주변 세상에 대한 우리의 노골적이거나 암묵적인 평가다. 태도는 사고의 틀이고,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마음의 지향성이다.”(마이클 린치) ‘술 취한 삼촌’처럼 항상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는 리버럴의 태도가 정치적으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깔보고 정복해야 할 야만 부족인 양 혐오하는 부족적 오만(tribal arrogance)를 낳았고, 이게 위기의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설명이 남 얘기처럼 들리지 않는다.



민주당이 숱한 강점과 선거 승리, 특히 압도적 총선 승리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대세로 자리 잡지 못하는 이유 중에 싸가지 결핍증, 부족적 오만도 있다. 보수세력의 정체성을 의도적으로 친일-독재에 가둬두고, 자신과 그들의 차이를 선악으로 구분하며 적대한다. 상대를 인정하는 가운데 우열을 다투면서 성과를 만들어내는 책임정치가 아니라 지적·도덕적 우월감으로 윽박지르는 신념정치에 빠져 있다. 그래서 선거 승리를 안정적 다수 연합으로 발전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성공한 진보의 사례를 보면, 진보가 보수를 파트너로 존중할 때 그리고 보수 세력의 일부와 연대할 때 다수파가 됐고, 세상을 바꿨다. 스웨덴의 사민당(SAP)은 오만과 배제가 아니라 타협과 포용으로 복지국가를 일궈냈다. 이렇듯 수적 과시나 힘자랑은 진보의 가치가 아니고, 그리 유용한 무기도 아니다.



마크 릴라는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에게 패배한 후 트럼프의 일탈적 모습에 매몰되면 안 된다고 일갈했다. 미국 민주당은 선거 때마다 숱한 가치, 공약, 정책제안을 했지만 정작 보통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한 비전, 살아가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에 대한 상(image)을 제시하지 못해서 패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정치자금이나 허위광고, 의혹 제기, 인종주의 때문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구상하는 경쟁에서 스스로 퇴각해서 졌다는 뜻이다. 지금 민주당에는 예의 평화와 복지만 익숙하게 되뇔 뿐 더 낫거나 새로운 것이 없다. 소득수준은 상층이나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여기는 이른바 ‘심리적 비(非)상층’을 과잉대표하고 있다.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끌어당길 시대 담론도 안 보인다.



민주당이 엄청난 호조건 속에서도 어이없게 정권을 넘겨준 이유는 간명하다. 요컨대 진보 인프라의 구축과 사회경제적 약자들을 정치적으로 활성화시키는 비전이나 담대함의 부족이다. 다시 강조하건대 지금까지 검증된 진보의 성공문법은 약자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고, 그들의 사회적·정치적 힘을 강화시키는 것뿐이다. 반사이익에 취해, ‘시끄러운 소수’의 환호에 취해 시간을 허비하면 흉내만 내는 ‘유사 트럼프’를 넘어 포퓰리즘 문법에 충실하고 팬덤정치에 능한 ‘진성 트럼프’가 순식간에 이 땅의 정치를 삼켜버릴지도 모른다. 두렵다!



한겨레

방송에서 정치평론을 하다 정치에 나서 20대 국회의원, 문재인 정부 마지막 정무수석을 지냈다. 2020년 ‘대통령 탄핵 결정요인 분석: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과정 비교’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인자를 만든 참모들’ ‘정치가 내 삶을 바꿀 수 있을까’ 등의 책을 냈고, ‘진보는 어떻게 다수파가 되는가’ 등의 역서가 있다. 우리 정치가 어쩌다 이렇게 나빠졌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야 나아질 것인지 등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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