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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8 (수)

[르포] 해병도 죽고 대통령도 왔는데···아직 폐허, 비만 오면 겁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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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19일 오전 9시10분쯤 경북 예천군 호명읍 황지리 보문교 일대에서 해병대원이 내성천 급류에 휩쓸려 숨졌다. 수해로 실종된 민간인을 수색하던 중 일어난 사고였다. 청년 한 명이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숨진 지 1년이 지났지만 책임을 묻는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대통령이 개입했다는 의혹도 나왔다.

정치권의 뜨거운 공방에 비해 수해를 당한 지역에 대한 관심은 시들하다. 지난해 이맘때 15명이 숨지고 2명이 실종된 경북 예천군 수해 현장을 13일부터 사흘간 돌아봤다. 현장은 비만 오면 언제든 수해가 반복될 위험에 놓인다. 주민 안전도 여전히 위협받는다.

가장 먼저 무너진 법륜사, 아직 흙더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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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사 표지석이 지난 14일 경북 예천군 은풍면 금곡2리의 길 위에 방치돼 있다. 오동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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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은풍면 금곡2리에는 1년 전 수해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마을 도로 곳곳이 움푹 파인 탓에 차량이 심하게 흔들렸다. 계곡 옆 도로 지반이 무너져 아스팔트가 허공에 솟아나왔다. 상흔은 마을 위쪽으로 향할수록 더 선명했다. 길 중간에 마련된 폐기물 임시야적장엔 철골이 박힌 시멘트 덩어리가 쌓였다. 사람 키만 한 법륜사 표지석도 쓰러진 채 길 한 가운데 방치됐다. 산을 깎아 만든 도로에는 흙무더기가 쏟아져 내린 상태였다.

법륜사 주지인 혜륜 스님(69)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지금은 그래도 많이 치운 것”이라고 말했다. 마을 맨 끝자락에 자리 잡은 법륜사는 지난해 집중호우로 가장 먼저 쓸려 내려갔다. 혜륜 스님은 새벽 1시쯤 “벼락보다 크게 우르릉하는 소리”를 듣고 법당 밖을 빠져나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고 했다. 그는 산사태 3일 만에 구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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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사 주지 혜륜 스님이 지난 15일 산사태가 덮쳤던 대웅전 주변 샘터에서 물을 뜨고 있다. 문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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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는 은사 스님이 글을 쓰던 하우스 천막에 있었다고 했다. 하우스 입구에 앉아 절이 산사태와 함께 휩쓸려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는 “아름드리나무와 집채만 한 바위가 굴러가는 것을 보고 마을 주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부터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곳은 아직도 사람이 살 수 있는 대비책이 전혀 마련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29일부터 경북 예천 등에 내린 장맛비로 금곡리는 다시 비상상황이 됐다. 지반이 유실되고 아스팔트 길이 파여 나갔다. 법륜사를 오르며 봤던 철골 박힌 시멘트들은 이번 장맛비에 뜯겨 나간 것이었다. 혜륜 스님은 장마로 길이 유실돼 공사하러 온 굴착기 기사가 다시 길을 만들면서 올라와야 했다고 말했다. 그가 집 입구를 가리켰다. 장맛비가 쓸고 내려온 흙 자국이 집 입구를 지나 바로 아래 주차장 터로 이어졌다. “저곳도 기사님이 길을 만들면서 다시 다져준 곳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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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집중호우로 2명이 숨진 경북 예천군 은풍면 금곡2리 법륜사 옆 계곡의 현재 모습이다. 산사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오동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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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륜 스님은 지금도 은사가 지내던 하우스에 머물고 있다. 하우스 입구에서 3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계곡에는 쓰러진 나무와 공사용 삼각콘이 그대로 남아있다. 싯누런 황토물이 바위를 내리치는 소리는 크고 섬찟했다. 14일 오후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기자의 핸드폰엔 ‘서비스 불가지역’이라는 표시가 떴다.

군청은 그에게 은풍면에 컨테이너 임시거처를 만들어 2년간 지낼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지만, 스님은 “틈나는 대로 논도 가고 밭도 가야 하는 주민들이 언제 차를 타고 임시거처에서 출퇴근하냐”며 거절했다. 그는 “계곡이라도 빨리 정비를 해 주민들이 실제 생활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군청에 여러 차례 요청했지만, 아직 대책도 없고 언제 어떻게 하겠다는 말도 없다”고 말했다.

해병대원들 구명조끼도 없이…아직도 어른거리고 분노 치밀어


혜륜 스님은 지난해 채 상병을 포함한 해병대원들이 수색하는 현장을 목격했다. 물난리가 나고 나흘 뒤 읍내에 가던 길이었다. 그는 “빨간 옷을 입은 해병대원 20명가량이 인간띠를 만들어 실종자를 수색하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해병대 수색 모습에 아직도 화가 치밀어 오른다고 했다. 구명조끼도 없이 고무장화를 신고 하얀 목장갑을 손에 낀 모습이 기억에 아른거린다고 했다. 장마로 물이 불어 내성천 수위는 물가에서도 허리보다 높았다고 했다.

그는 “마을에서 군인들도 당시 모여서 웅성웅성했는데, 그때 해병 한 명이 죽었다는 것을 듣게 됐다”고 말했다. 곧바로 구명조끼도 없이 고무장화 신고 수색하던 장면이 떠오른 그는 평소 하지 않던 욕설을 내뱉었다. 아직도 당시를 생각하면 욕지기가 치밀어 오른다고 했다.

“물이 그렇게 불었는데 수색을 왜 시키냐고요. 물이 좀 낮아지면 찾아도 되잖아요. 구명조끼도 입지 않고, 고무장화를 신고 있었어요. 토사물이 쏟아져 유리나 날카로운 철제도 같이 쓸려갔을 텐데 고무장화를 신게 하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건 세 살배기 아이들도 알아요.” 분노어린 말이 계속 이어졌다. “사망 소식을 듣고 마을 분위기도 안 좋았어요. 우리 마을에서도 사람이 매몰됐고, 해병들은 매몰된 사람 찾으려던 것이니까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데 도대체 누구한테 욕을 해야 하는 거예요? 사단장이에요? 정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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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경북 예천 수해 피해 실종자를 수색하다 급류에 휘말려 목숨을 잃은 해병대 채 상병의 1주기를 나흘여 앞둔 15일 사고 지역 인근 보문교에서 바라본 내성천에 물살이 소용돌이치며 흐르고 있다. 문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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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해병은 보문교 인근에서 수색 작전 중 내성천 강물에 쓸려갔다. 보문교 인근에 있는 보문면 미호2리에 사는 토박이 전모씨(63)도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경찰인 그의 조카도 지난해 수해 현장에 나와 일했기 때문에 더 자세히 기억한다고 했다. 전씨는 “당시에 구명조끼도 없이 빨간 옷을 입은 해병대원 50여명이 강에 들어가려고 내성천 모래톱에 서 있었다”며 “내가 그걸 보면서 ‘아 저거 위험하다’고 혀를 차면서 내 조카한테 구명조끼 없인 절대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고 회상했다.

전씨와 함께 상황을 지켜봤던 김종걸씨(71)는 사고 당시 채 상병이 들어간 곳에 대해 “물이 빙빙 도는 소인데, 어릴 적에 고기 잡으러 가면 밑으로 쑥 빠져서 동네 주민들도 들어가지 않는 곳”이라고 말했다. 겉 보기엔 얕아 보여도 물이 소용돌이치는 깊은 곳이라는 것이다. 김씨의 말처럼 보문교 위에 서서 본 강폭이 가장 좁은 지역에는 물이 빙빙 돌고 있다.

전씨는 “딱 이맘때가 물이 가장 많을 때”라며 “주민들에게 물어보기라도 했으면 들어가지 말라고 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전씨는 “도대체 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슨 수색을 해야 했는지, 왜 들어가게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할매 손 붙잡고 잘해주겠다더니”…이주는 아직 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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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파크 주차장 부지에 지어진 경북 예천군 효자면 백석리 수해 피해자들이 머무는 임시거처. 오동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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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효자면 백석리는 지난해 집중호우로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본 곳이다. 집 7채가 부서졌고 5명이 사망했다. 신은석씨(69)도 지난해 수해로 아내를 잃었다. 신씨는 지금 백석리 수해 피해자 중 임시거처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사람이다.

백석리 임시거처는 신씨 집에서 3㎞ 정도 떨어졌다. 테마파크 앞 주차장 부지에 들어섰다. 길가라 주변에 가게 하나 없다. 물건을 사려면 차를 몰고 나가야 한다.

신씨는 지난주 급히 서울 아들 집으로 피신했다. 비가 많이 내려 불안했다. 그는 14일 기자와 통화하면서 “임시거처는 죽지 못해 사는 곳이다. 사고 때 생각이 자꾸만 난다”고 말했다. 신씨는 “복구는 시작도 하지 않아 마을로 아직 들어갈 수 없다. 복구에 손도 대지 않아 걱정이 태산”이라고 했다.

마을에 돌아간 사람도 복구가 길어지고 있다며 불안을 호소했다. 경기도에서 일을 하던 이상무씨(29)는 아버지가 지난해 수해로 다리 한쪽을 잃는 바람에 본가로 돌아왔다. 이씨는 “지금도 빗소리만 나면 플래시를 들고 산 위쪽을 비춰본다”고 말했다. 이씨는 “심지어 장마에 공사를 멈춘 포클레인 기사도 혹시 무슨 일이라도 날까 봐 흙이 아닌 포장길 위에 포클레인을 대놨다”며 “토사물을 막는 사방댐도 만들고 물길도 바꾼다고 하는데 솔직히 불안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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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집중호우로 주택 11채가 피해를 본 경북 예천군 벌방리에서 15일 박우락 이장이 복구되지 못한 주택을 살펴보고 있다. 문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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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채가 수해 피해를 본 경북 예천군 감천면 벌방리 사람들도 걱정은 마찬가지였다. 박우락 이장은 벌방리 노인회관에서 수해 관련 뉴스가 나오자 연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는 지난해 산사태가 몰려오는 것을 보고 마을 반대편 다리 건너 도망쳤는데 다리가 토사물을 막아준 덕에 구사일생했다. 박 이장은 “산 사람들은 살아야 하니 어르신들한테는 잊자고 말하지만 ‘수해’ 같은 단어를 들으면 자꾸 실종자 2명이 생각난다”며 눈물을 보였다. 그는 “지난주에 비가 오니까 대피 방송을 하기도 전에 수해 입은 어르신들이 먼저 마을회관 앞에 와 있었다”며 “솔직히 불안함이 다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벌방리 수해 피해자들은 마을회관 앞에 조성된 27㎡(8.6평)짜리 컨테이너 임시거처에서 살아간다. 지난해 집에 쓸려가 형수를 잃은 한영훈씨(63)는 “형님 집에 오면 차양이 없다. 비가 와도 창문도 못 연다. 집이 좁아 살림살이도 늘리지 못한다”고 불편을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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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집중호우로 주택 11채가 피해를 본 경북 예천군 벌방리에 15일 당시 쓸려 내려온 바위와 토사가 방치돼 있다. 문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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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이장은 “(군청 등에서는) 올해 말이나 돼야 단지를 조성하기 위한 삽을 뜨겠다고 한다”며 “재해 입은 사람들은 지금 바로 이주 단지가 조성되길 기다리는데 관에서는 아직도 절차만 밟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이 왔다 가면서 할매 손을 붙잡고 ‘대통령이 왔으니까 알아서 잘해준다’고 했는데 아직도 부서에서 논의를 해야만 한다고 말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박 이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경제적 이유로 이주를 철회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처음에는 빗소리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고 돌 구르는 소리만 들어도 잠을 못 자겠다며 19가구가 이주를 신청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17가구, 14가구로 줄었다”고 말했다. 평균 4000만~5000만원 가량의 보상금으로 택지는 살 수 있지만, 건물을 올리기는 힘들다. 고령의 수해 피해자들은 또다시 은행 빚을 져 자식에게 부담을 줄까봐 이주를 고민했다. 백석리에 집을 다시 지은 성모씨는 “자잿값이 많이 올라 집을 다시 짓는데 공사비만 1억원이 넘게 들었다. 이건 우리 집이 아니라 은행 집”이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예천 | 오동욱 기자 5do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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