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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8 (일)

[에스프레소] 안락사냐 영생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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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 내 행복하게 죽는 안락사

육체·정신이 기계와 합쳐져 영생 기대하는 미래도

삶과 죽음, 선택의 영역 되나

감기를 2주간 앓아서 기력이 떨어진 몸에 장염과 위염이 한 번에 덮쳤다. 열이 오르고 복통·두통·근육통이란 삼중고에 잠을 설친 어느 새벽,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 24시간 약국을 검색했다. 걸어서 20분 거리에 약국이 있었다. 차마 70세가 넘은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새벽 세 시 약국행을 부탁할 순 없었다. 끙끙거리며 눈을 질끈 감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약국 생각에, 부모님 생각에 어느덧 70대가 됐을 때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앞으로 신상에 변동이 없다고 가정할 때 혼자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이야 감기나 장염 정도로 고생하지만 그땐 더 큰 병에 걸릴 수도 있다. 호흡이 곤란해지거나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상황이 발생하면 몸에 차고 있는 스마트 시계·반지와 같은 웨어러블 기기를 통해 병원에 연락이 갈 것이다. 그 후에도 의식이 없거나 거동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혼자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는 게 가능할지, 치료를 받은 뒤 아프기 전처럼 생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더 큰 문제도 있다. 치매에 걸린 독거 노인의 일상은 도무지 가늠이 가질 않는다. 초기 치매 증상을 자각했을 때 제 발로 요양병원에 들어가야 할까. 그곳에서 먹고 자며 목숨을 이어 간들, 그렇게 보내는 시간을 온전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노화와 함께 맞닥뜨릴 수 있는 온갖 질병과 고통에 대해 생각하다가 그날 오후에 본 ‘안락사 캡슐’ 기사가 떠올랐다. 지난 18일 AFP통신에 따르면 안락사 단체 ‘더 라스트 리조트’는 곧 스위스에서 조력 자살을 위해 ‘사르코’가 사용될 것이라고 밝혔다. 사르코는 캡슐 내부 산소를 질소로 바꿔 저산소증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다. 버튼만 누르면 30초가 채 되지 않아 공기 중 산소량이 21%에서 0.05%로 급격히 떨어지고 그 후 사망 전 약 5분 동안 무의식 상태에 머물게 된다. 심지어 무의식 상태에 들어가기 전 약간의 행복감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진통제를 들이부어도 이길 수 없는 고통에 육체와 정신이 너덜너덜해질 바엔, 치매 독거 노인이 되어 인간이 아닌 무생물과 같은 존재로 취급받을 바엔, 사르코에 몸을 뉘이는 것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사르코는 석관을 뜻하는 ‘사르코파구스’에서 따왔다.

극심한 고통에 이르는 병이나 치매에 걸릴 경우, 어떻게 사르코가 있는 스위스까지 갈 수 있을지 궁리하고 있을 때 최근 테크 전문지 와이어드에 실린 레이 커즈와일의 인터뷰가 생각났다. 신시사이저 키보드 브랜드로 유명한 커즈와일은 우리 시대의 발명가이자 천재이고 괴짜다. ‘특이점이 온다’(2005)는 베스트셀러로도 잘 알려졌는데, 지난달 ‘특이점이 더 가까이 왔다’라는 신간을 냈다.

커즈와일은 인간이 아직 발명되지 않은 의료 기술을 활용해 더 오래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특이점에 다다르면 기계와 합쳐지고 초지능이 되어 무한히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람들이 99세까지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만 막상 99세가 되면 생각이 달라진다”며 120세, 아니 300세까지 사는 인생에 대해 이야기했다. AI의 발전에 따라 신약과 치료제 개발 속도는 비약적으로 빨라질 것이고 40~50년 후 보편화될 반려 로봇이랑 함께라면 노인 혼자여도 안전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르코에 들어가려고 했던 늙고 병든 나의 육신은 어느새 AI와 한 몸이 되어 생의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사르코와 커즈와일 사이를 수없이 오간 밤을 보내자, 동이 트고 열이 식었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을 때 둘 다 잊어버린 채 앞으로 술을 줄이고 운동도 시작하자는 결심만 떠올랐다. 안락사도 영생도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이 다가오고 있지만,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는 게 최선이다

[변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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