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9.11 (수)

갑자기 의사 일 떠맡은 PA 간호사, 문제 생기면 누가 책임지나?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수도권 사립대병원 간호사]
내가 속해 있는 병원은 수도권에 위치한 상급종합병원으로 지역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특히 권역응급의료센터와 권역외상센터는 재난 및 코로나와 같은 집단 감염환자 발생에 대비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24시간 전국 응급환자 및 중증 외상환자 치료에 힘쓰고 있다.

하지만 지난 2월 20일부터 시작된 의정 갈등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병원 현장에는 불안감이 감돈다.

의정갈등 사태 초반에는 협상이 잘 되고 금방 회복될 거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전공의 의존도가 타 병원에 비해 낮기 때문에 큰 어려움이 닥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러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됐고, 우리 병원 또한 비상경영체제 돌입을 피할 수 없었다.

인력관리를 통한 재원 감소와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미 타 병원에서 시행 중이던 무급휴가 도입, 연차사용 독려, 연장근로 제한 등을 시행했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강제 연차휴가 사용, 강제 무급휴가 사용, 인력 충원 연기, 연장근로에 대한 불합리한 보상 등 병원 노동자들을 나락으로 밀어 넣고 있다.

의정갈등 사태 초기 보건복지부에서 간호사 업무 시범사업 가이드라인을 내리면서 각 병원장 책임하에 간호본부와 협의하여 PA(진료지원, Physician Assistant) 간호사 업무 범위를 정할 수 있도록 했을 때로 돌아가 보자. 교수들은 시범사업 가이드라인에 포함된 대부분의 의사 업무를 각 과 PA 간호사에게 미루기 일쑤였다. 이전까지는 대부분 전공의가 하던 업무였다.

현장을 떠난 전공의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간호사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의사 업무를 해낼 수밖에 없었다. 한번도 해보지 못한 의료기술을 하루 이틀 만에 터득해 직접 시행해야 했다. 대면 교육도 받을 수 없었다. 비대면 영상교육을 통해 혼자 의사 업무를 습득하고 바로 현장에 투입됐다.

그간 논의조차 되지 않았던 PA 법제화도 갑자기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정부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병원장이라는 방패가 있다고는 하지만 실질적 법률 다툼에 직면하면 업무를 실행한 간호사에게도 책임이 따를 것이다. 생소한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부담감도 가중되고 책임감도 따르는 이 일을 왜 남아있는 간호사들이 고스란히 떠안고 있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빅5 병원'에서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가 부족해 예정됐던 수술이 미뤄지고, 시술로 바뀌는 일이 일어나자 밀려난 환자들이 결국 지방병원인 우리 병원까지 오게 됐다.

의정갈등 사태가 아니었다면 만날 일도 없었을 테지만, 그렇게 밀려 온 환자들을 상대하는 것 또한 남겨진 PA 간호사들의 몫이다. 환자와의 신뢰가 형성되기도 전 불신과 원망에 가득 찬 환자들을 상대하는 건 명의에게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수많은 업무를 갑자기 떠안게 된 PA 간호사가 제도화된다고 해도 직역 간 갈등과 업무 범위에 대한 논란은 한동안 가라앉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한시적으로 합법적 자격을 얻고 현장을 지키던 PA 간호사들이 불합리한 처우를 받게 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앞선다. 이를 막으려면 업무범위와 책임소재에 대한 명확한 법제화가 필요하다.

의사 대부분은 본인의 업무를 PA 간호사에게 맡기면서도 PA 간호사 법제화에는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기적인 모습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정부는 수련병원을 전공의 의존도가 낮은 병원으로 만들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시라도 빨리 실질적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우리 병원 또한 전공의 복귀 마지막 날까지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떠나간 전공의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럴 시간에 PA 간호사 업무량 조정과 전공의 대체 인력을 충원하였어야 했던 게 아니었을까.

비단 우리 병원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매일 나오는 뉴스들을 통해 빅5 병원의 경영난을 익히 듣고 있다. 그나마 빅5 병원은 지방병원보다는 버틸 여력이 있을 것이다. 의정갈등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서로 조금씩 물러서서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해결을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지방병원에서 수련하던 전공의들의 수도권 병원 지원이 열렸다고는 하나 수도권 쏠림 현상으로 지방은 더욱더 심각한 인력난을 마주할 것이다. 그럼 지방병원에는 더 고액의 연봉을 불러가며 의사를 채용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까? 악순환의 반복일 뿐이다.

환자와 보호자들이 의료 서비스를 기다리는 동안 불안감과 불편함으로 고통받는 일도 늘어나고 있다. 이는 사회 안정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어느 개별 병원의 문제도, 개별 병원노동자의 문제도 아니다. 국민의 생명이 걸린 중요한 문제이다. 정부, 의사 단체 및 관련 당국이 협력하여 빠르게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이다. PA 간호사 법제화 문제 역시 의사, 병원 노동자들의 권리와 함께 환자들의 안전을 동시에 보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프레시안

▲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사진은 본 글과 무관).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수도권 사립대병원 간호사]

- Copyrights ©PRESSian.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