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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자 첫 탄핵 대통령.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6년 국정농단 사태에 휘말리며 기약 없는 파국의 길을 걸었습니다. 4년 9개월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2021년 12월 31일 사면된 박 전 대통령은 국내 언론 최초로 더중앙플러스 '박근혜 회고록(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187)'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공개한 바 있습니다.
중앙일보 독자 여러분을 위해 재임 기간 동안의 국정 비화와 최순실 게이트 등 박 전 대통령의 솔직한 심경이 담긴 회고록을 각 파트별로 엄선하여 1화를 전문 무료로 공개합니다.
‘The JoongAng Plus(더중앙플러스)’는 중앙일보의 역량을 모아 마련한 프리미엄 지식 구독 서비스로, 재테크·육아·건강 등 134개에 이르는 다양한 시리즈를 구독 후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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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 국내 정치편〉
그날 밤, 연락 끊은 유승민…그와의 관계 그때 파탄 났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6770
朴 “내가 혼외자 터뜨려 채동욱 찍어냈다? 황당하단 말도 아깝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9967
안대희·이완구 다 날아갔다…“가슴 쓰렸다” 총리 잔혹사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9668
통진당 해산 반대한 문재인…朴 “위기때 실체 드러나는 법”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0295
박근혜가 직접 택한 남자…“그가 내 앞에서 울먹였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3922
유승민 그리 키울 일 아니었다…2016년은 정말 되는 게 없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7097
“내가 알던 진영 아니었다” 朴 놀라게한 측근의 돌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7448
한국에서 청와대와 여당의 관계는 미묘하다. 집권 초에는 청와대와 여당이 일심동체처럼 움직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양쪽의 견해차가 점점 심해진다. 더는 선거에 나설 필요가 없는 대통령은 정해진 5년 임기 내에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언제나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국회의원들은 다음 선거에서의 당선을 최우선 목표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대통령이 국가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선거에 도움이 안 되면 여당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그래서 대통령 입장에서 여당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 것은 성공적인 국정 운영에 매우 중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내가 재임 중에 새누리당과의 관계를 보다 원만히 풀어가지 못한 건 큰 회한으로 남아있다.
당·청 관계에서 전기점이 생긴 것은 2014년 7·14 전당대회였다. 황우여 대표가 2년의 임기를 마친 뒤 새 대표를 뽑는 경선이 벌어졌는데 서청원 의원과 김무성 의원이 양강 구도를 형성했다. 나는 개인적인 관계로 볼 때 서청원 의원이 여당 대표가 되는 게 당·청 관계에 좀 더 보탬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당내 친박계가 주로 서 의원을 밀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직접 경선에 개입하면 부작용이 클 게 뻔해 내 의중을 내비치는 것은 최대한 자제했다. 그러잖아도 서 의원과 김 의원이 세게 충돌하면서 경선 후유증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컸다. 나는 경선 당일 잠실체육관에 가 ‘1호 당원’으로서 인사말을 통해 “치열한 경선 과정에서 주고받은 서운한 감정은 잊고 새 지도부를 중심으로 하나가 돼 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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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박 좌장’ 서청원 꺾고 대표된 김무성
2014년 7월 14일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새누리당 전당대회에서 김무성 의원(오른쪽)이 대표로 선출됐다. 왼쪽은 서청원 의원.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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뚜껑을 열어 보니 김무성 의원이 29.6%의 득표율로 서청원 의원(21.5%)을 예상보다 큰 격차로 이기고 새 당 대표가 됐다. 당시 경선 결과에 대한 보고를 들어보니 김 의원이 상향식 공천을 하겠다고 공약한 게 의원들과 원외 당협위원장들에게 상당히 어필했다고 한다. 당원들이 후보를 뽑는 상향식 공천은 정당 민주화라는 대의명분만 놓고 보면 이상적인 제도다. 민주주의의 전통이 굳건한 구미 선진국에선 보편화된 제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풀뿌리 정당정치 기반이 아직 취약한 한국에선 상향식 공천이 자칫 현역 의원들의 기득권을 강화하는 도구로 악용될 수 있다. 정치 신인들은 각종 규제로 꽁꽁 묶여 있기 때문에 경선에서 자금·조직력·인지도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현역 의원들이나 당협위원장을 꺾기란 굉장히 어렵다. 나는 그런 부분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언론에선 나와 김무성 의원을 애증의 관계로 묘사하곤 했다. 김 의원은 2005년 내가 한나라당 대표 시절에 사무총장으로 발탁해 인연이 시작됐다. 2007년 대선 경선 때도 캠프에서 핵심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시절에 소원해졌다. 2009년 5월 당시 청와대가 김 의원을 원내대표에 추대하려고 했으나 내가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되는 일이 있었다. 2010년 세종시 수정안 논란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김 의원이 세종시 원안에 대한 절충안을 제시했지만, 나는 “가치 없는 얘기”라고 잘랐다. 나는 이른바 ‘친박 좌장’으로 불리는 인사가 세종시에 대해 나와 다른 의견을 얘기하면, 외부에서 내 생각도 달라진 것 아니냐는 혼선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친박에는 좌장이 없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그 후 김 의원은 친이계의 지원을 받아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됐다. 그렇게 나와는 완전히 멀어지나 싶었지만, 정치라는 건 앞날을 예단하기 힘들다. 김 의원은 2012년 대선 때 우리 캠프가 난조에 빠지자 총괄선대본부장을 맡아 진용을 수습하고 대선 승리에 공로를 세웠다. 김 의원이 당 대표가 된 것은 대선 기여도에 대한 당원들의 평가도 작용했을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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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성 빼고 만찬’ 오해 커져 아쉽다
과거야 어찌됐든 김무성 의원은 여당 대표가 된 이후 청와대와 호흡을 잘 맞춰보려고 의욕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돌출적 사건도 가끔 생겼다. 대표적인 게 2014년 10월 16일 ‘개헌 발언’이다. 김 대표가 방중 기간에 수행 기자들과 간담회를 하면서 “정기국회 후 개헌 논의의 봇물이 터질 것 같다”며 “오스트리아식 이원정부제를 검토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나는 이미 그해 신년 회견에서 개헌 논의에 대해 “개헌은 워낙 큰 이슈이기 때문에 한번 논의가 시작되면 블랙홀같이 모두 거기에 빠져들어서 할 것을 못한다”며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민생 안정과 경제 회생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시점에 정치권이 엉뚱한 데 에너지를 소모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김 대표 발언 직전인 10월 6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도 나는 “개헌론은 경제를 삼키는 블랙홀이 될 것”이라며 재차 개헌 논의 자제를 요청한 상태였다. 그런 대통령의 입장을 모를 리 없는 여당 대표가 기자들 앞에서 느닷없이 개헌 얘기를 꺼냈으니 당연히 파장이 클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는 이탈리아에서 열린 아시아·유럽정상회의에 참석 중이었다. 한국에서 온 김 대표 발언 소식을 듣고 곤혹스러웠다. 그나마 다음 날 곧바로 김 대표는 공개석상에서 자신의 발언이 불찰이었다고 해명했다고 보고받았다. 본인이 발언을 취소한다는데 내가 더 말을 보태고 싶진 않았다.
그 뒤로 김 대표는 여권의 최대 현안이었던 공무원연금 개혁에 발벗고 나섰다. 공무원연금법 개정안을 직접 대표 발의했고, 인기 없는 개혁을 주저하는 여당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요지부동인 야당과도 타협안을 만들기 위해 애쓴 것으로 안다. 그렇게 김 대표와의 관계가 개선되나 싶었는데 또다시 뜻하지 않은 악재가 생겼다. 2014년 12월 19일 대선 승리 2주년 기념으로 청와대에서 일부 친박계 중진 의원들과 비공개로 만찬을 했는데 여기에 김 대표가 빠진 사실이 뒤늦게 언론에 알려진 것이다. 사실 그날 만찬은 내가 제안한 게 아니고, 당의 한 인사가 먼저 건의했던 것이다. 그분은 나와 김 대표의 관계가 껄끄럽다고 생각해 김 대표를 만찬 모임에 부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조용히 밥만 먹고 끝났으면 별일도 아니었을 일인데, 나중에 참석자 중 한 명이 만찬을 언론에 흘리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
원래 그 무렵 나는 김 대표를 따로 한 번 보려고 마음먹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갑자기 언론에 ‘김 대표를 뺀 만찬’이 보도되면서 모양이 우습게 됐다. 이제 와서 김 대표에게 만나자고 연락하면 오해받기 딱 좋을 것 같았다. 일이 그렇게 되면서 김 대표와의 회동은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에 좀 어색하더라도 김 대표를 만나는 게 좋았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지나고 나면 아쉬운 일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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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지하통로 함께 걸었던 유승민…벽이 가로막은 느낌
2015년 6월 8일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한 김무성 대표(오른쪽)와 유승민 원내대표.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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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새누리당 원내대표 경선에서 유승민 의원이 이주영 의원을 누르고 당선되면서 당·청관계는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언론은 여당의 대표와 원내대표 투 톱이 모두 비박계가 됐다고 대서특필했다. 나는 김무성 대표가 유 의원을 민 게 경선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고받았다.
유승민 의원은 정치권의 인연으로 따지면 오래된 사이다. 내가 한나라당 대표로 2004년 총선을 치를 때 공천을 직접 챙겼던 사람이 있는데 그게 바로 유 의원이었다. 강재섭 전 대표가 내게 전화를 해서 “이회창 전 총재가 자신이 아끼던 유승민 전 여의도연구소장의 비례대표 공천을 부탁한다”고 전해줬다. 당시 나는 유 의원이 누군지 전혀 몰랐지만 이 전 총재를 예우하는 차원에서 유 의원의 비례대표 순번을 안정권 이내로 조정했다. 이후 유 의원은 내 비서실장을 역임했고, 나의 요청으로 2005년 10월 대구 동을 재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당시 재선거 때 열린우리당의 상대 후보(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가 워낙 거물이라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선거를 도왔다. 유 의원은 2007년 대선 경선 캠프에서도 핵심으로 활약했다.
그랬던 유 의원은 언제부턴가 나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나는 이명박 정부 시절에 차기 대선 출마를 위해 전문가·학자들과 정책을 토론하고 공약을 수립하는 모임을 운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유 의원이 모임에 안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에 유 의원이 바쁜 일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는데 그 이후에 계속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정확히 그 이유를 모른다.
2012년에 있었던 일로 기억한다. 나와 유 의원이 국회 의원회관에서 본관까지 이어지는 지하통로를 모처럼 함께 걸어간 적이 있다. 둘만이 대화할 기회가 생긴 건 오랜만이었다. 당시에 이미 나와 유 의원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나올 때여서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일부러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면서 얘기를 계속 걸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대화가 계속 겉돌았다. 나와 유 의원 사이를 어떤 벽이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었다. 꽤 긴 거리를 걸었지만 헤어지고 나서 씁쓸했던 기분이 지금도 기억난다.
짐작건대 아마 유 의원은 자신이 추구하는 정치 노선과 내가 걷는 길이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정치인이 자신의 주관대로 정치하는 것은 남이 뭐라고 할 일이 아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국민에게 평가받고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책임을 지면 된다. 다만 대통령 입장에선 가장 호흡이 잘 맞아야 할 여당의 원내대표가 자기 색깔이 강한 사람이라면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유 의원이 원내대표에 당선됐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앞으로 당·청 관계가 쉽지 않겠다는 걱정이 든 게 사실이다. 우려는 머잖아 현실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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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섭단체 연설서 정부 때린 유승민
유 의원은 2015년 4월 8일 국회 교섭단체 연설에서 “공약가계부를 더는 지킬 수 없다. 지난 3년간 예산 대비 세수 부족은 22.2조원”이라며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임이 입증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창조경제를 성장의 해법이라고 자부할 수는 없다”고 깎아내리면서 “야당이 제시한 소득주도형 성장론도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당시 나는 연설 장면을 TV 중계로 직접 봤는데 그의 발언을 납득하기 힘들었다. 일반 의원이면 자기 생각을 강조해서 말할 수 있겠지만, 원내대표는 당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국회 연설에선 더욱 그렇다.
그런데 여당 원내대표가 교섭단체 연설에서 정부의 핵심 정책과 대통령의 핵심 공약을 부정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나로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유 의원이 원내대표 경선에서 “내가 당선되면 정부의 핵심 공약을 뒤집겠다”고 미리 밝힌 다음에 당선된 것도 아니지 않은가.
2015년 4월 8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교섭단체 연설을 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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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설 내용도 문제가 많았다. 나는 증세를 말하기 전에 기존 복지 지출의 효율성을 제고하는 게 먼저라고 봤다. 여기저기서 줄줄 새는 돈과 불필요한 지출을 최대한 절약해 재원을 마련하고, 비과세 감면과 지하경제를 축소해 세원을 넓히는 노력을 하는 게 우선이란 것이다. 그런 노력도 없이 세금부터 더 내라는 것은 절대 안 된다는 게 나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실제로 나는 그런 노력을 기울여서 상당한 성과를 냈다. 유 의원이 말한 3년간 22.2조원의 세수 부족은 이명박 정부에서 2013년도 예산을 짤 때 너무 낙관적으로 세입 전망을 짰기 때문에 구멍난 게 대부분이었다. 우리 정부는 증세하지 않고도 그 구멍을 거의 다 메웠고, 재정 건전성을 아주 양호하게 만들어 문재인 정부에 나라의 곳간을 넘겨줄 때 세수를 알뜰하게 많이 남겼다. 나중에 박근혜 정부가 재정기반을 잘 닦아 놓은 덕분에 문재인 정부가 큰 도움을 받았다는 말까지 나오지 않았는가. 또 유 의원은 대기업의 법인세 인상도 시사했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기업들이 투자환경이 좋은 나라로 몰려다니는 마당에 우리만 법인세를 올리자는 건 투자를 위축시킬 수 있는 위험한 주장이었다.
창조경제에 대한 폄훼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창조경제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창출하려는 ‘한국식 4차 산업혁명’이었다. 창조경제는 제대로 된 성장 해법이 아니라면서도 유 의원은 야당(당시 새정치민주연합)의 소득주도 성장론은 환영한다고 하니 나는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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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법 개정안 통과 전 연락 피한 유승민, 어처구니없었다
유 의원과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파탄이 난 건 공무원연금개혁 때였다. 당시 공무원연금은 시한폭탄 같은 상태였다. 문제가 크지만 손대기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이전 정권에서 그냥 떠넘기기만 했다. 나는 이왕에 공무원연금을 개혁하려고 마음먹었으면 20~30년은 갈 수 있는 개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적으로 부담이 큰 사안이라 자주 손질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5년 5월 국회에서 만들어 온 협상안을 보니 내 기대에 못 미쳤다.
그래서 내가 공개적으로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협상안을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김무성 대표를 비롯한 여당 지도부가 “협상이란 게 상대가 있기 때문에 이게 최선”이라고 설명하는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도 국회 생활을 오래 해봤기 때문에 야당이 끝까지 협조를 안 해주면 방법이 없다는 걸 잘 안다. 여당도 나름대로 고충이 많았을 테니 “애 많이 쓰셨다”고 격려하면서 결과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런데 공무원연금법 개정 합의의 부대조건으로 국회법을 개정하기로 합의했다는 얘기가 들렸다. 대통령령에 대해 국회가 수정·변경권을 갖도록 국회법을 고치겠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국회법 개정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 정부는 국회선진화법에 가로막혀서 국회에선 의미 있는 법안 처리를 하나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대통령령의 재량 범위 내에서 조금씩 고쳐가면서 근근이 버텨 나가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국회법을 고쳐버리면 국회가 대통령과 정부의 손발을 꽁꽁 묶겠다는 얘기 아닌가. 나는 몹시 화가 났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도대체 무슨 생각에서 그런 합의를 해준 것인가.
2015년 5월 28일 여야 지도부는 공무원연금법 개정안과 국회법 개정안 등을 일괄 처리하는 방안을 놓고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협상을 벌였다. 나는 이미 일찌감치 조윤선 정무수석을 통해 여당 지도부에 국회법 개정안은 삼권분립 위반이기 때문에 절대로 받아선 안 된다는 입장을 전달한 상태였다. 하지만 국회에서 들려오는 얘기가 점점 여당이 개정안을 받는 쪽으로 기울어진다는 것이었다. 유 원내대표는 조 수석을 대화 상대로 존중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하긴 그는 국정감사 질의 때 “청와대 얼라들”(2014년 10월 7일)이란 말까지 했을 정도였으니.
나는 불안해져서 5월 28일 저녁 이병기 비서실장에게 “이상한 얘기가 자꾸 나오는데 국회법 개정안은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유승민 원내대표한테 다시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그랬는데 이 실장이 원내대표와 연락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유 원내대표가 일부러 연결을 피하는 듯했다. 어처구니없었다. 원내대표로서 아무리 협상이 어렵다지만 당·청이 한 팀이라면 그런 중차대한 사안은 서로 의논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나중에 이 실장이 조해진 원내수석부대표하고 연락이 닿았는데 협상이 종료돼 되돌리기는 이미 늦었다는 반응이라고 했다. 결국 나는 속수무책인 상태에서 국회법 개정안이 29일 새벽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당시에 언론 보도까지 나왔지만 알고 보니 당시 야당 측이 “이런 사안은 대통령이 잠자는 한밤중에 해치워 버려야 한다”고 제안해 여당이 그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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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의 정치” 대통령 아닌 국민 배신 말한 것
2016년 7월 8일 박근혜 대통령은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 및 국회의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영빈관에서 오찬을 함께했다. 박 대통령 오른쪽 뒤편에 유승민 의원의 모습이 보인다.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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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 전개를 보고 나는 더는 유승민 원내대표와 함께 일할 수 없다고 결심했다. 나는 6월 25일 국무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헌법이 규정한 삼권분립의 원칙을 훼손해 위헌 소지가 크다”며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어 “여당의 원내사령탑도 정부·여당의 경제 살리기에 어떤 국회의 협조를 구했는지 의문”이라며 “정치는 국민의 민의를 대신하는 것이고, 국민의 대변자이지, 자기의 정치철학과 정치적 논리에 이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당선된 후에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결국 패권주의와 줄 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이라며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께서 심판해 주셔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내가 말한 배신은 대통령에 대한 배신이 아니라 국민에 대한 배신을 의미한 것이다. 우리가 “국민에게 뽑아주시면 이러저러한 일을 하겠다”고 약속해서 당선됐으면 그 약속을 충실히 지켜야 한다. 여당 원내지도부가 정부의 공약 이행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국민에 대한 배신이 된다는 것을 가리킨 것이다. 내 발언 이후 새누리당에서도 유 원내대표가 더는 직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분위기가 확산돼 그는 7월 8일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사퇴 회견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갑자기 헌법 얘기를 꺼낸 게 참 뜬금없다고 생각했다. 헌법 정신으로 따지자면 자신이 통과시킨 국회법 개정안이야말로 헌법의 삼권분립 원칙을 침해하는 반헌법적 내용 아니었나.
▶〈제3부- 국내 정치〉 다음 편이 궁금하시다면,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朴 “내가 혼외자 터뜨려 채동욱 찍어냈다? 황당하단 말도 아깝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9967
안대희·이완구 다 날아갔다…“가슴 쓰렸다” 총리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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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진당 해산 반대한 문재인…朴 “위기때 실체 드러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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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3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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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던 진영 아니었다” 朴 놀라게한 측근의 돌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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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회고록’ 다시보기 목차
〈인터뷰 영상 풀버전〉
박근혜 前대통령 침묵 깼다 “탄핵 제 불찰, 국민께 사과”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5342
〈1부 - 최순실과 탄핵〉
“최순실과 이혼한 줄도 몰랐다”…朴이 밝힌 ‘정윤회와 인연’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71726
문건 배후엔 김무성·유승민? 朴 “촉새 女의원의 음해였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3665
“대통령님, 비덱이 뭔가요?” 잡아뗀 최순실, 난 믿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3853
“이러려고 대통령 했나 자괴감” 참모 말린 이 말 직접 넣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4162
시중에 나돈 ‘탄핵 찬성’ 62명…날 힘들게 한 명단 속 그 이름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4472
최순실 일탈 왜 보고 안됐나…어렴풋이 짐작 가는 게 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7551
〈2부 - 정책편〉
내가 삼성병원장 꾸짖었다? 사진 한장이 괴담 만들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9249
난 욕 먹고 연금개혁했는데…文, 손 하나 까딱 안 하더라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5050
“지구상 이런 나라 몇 있을까”…내가 국정교과서 마음 먹은 순간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2773
〈4부 - 외교안보편〉
“위안부 합의 들은 적 없어” 윤미향 오리발, 말문 막혔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6717
朴 커터칼 테러때 도착한 쇠고기, 거기엔 아베 편지 있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6960
안 그래도 ‘최순실’ 터졌는데…朴, 왜 논란의 지소미아 집착했나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7297
개성공단 폐쇄, 내가 선수쳤다…뻗대던 北, 그제야 꼬리내렸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5335
김관진 “협상 결렬” 문 박차자, 김양건 “뭔 결렬” 팔 붙잡았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5632
그토록 공들여 성공한 첫 방미…하필 그때 윤창중이 사고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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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전승절때 구석 밀려난 北, 최용해는 나와 눈 마주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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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전투기가 되겠냐던 文, KF-21 출고식서 “우리가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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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발까지 쓴 표창원·손혜원…춤추며 ‘사드 괴담’ 퍼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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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부 - 세월호의 기억편〉
“내가 정윤회와 호텔서 밀회?”…朴 직접 밝힌 ‘세월호 7시간’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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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그날 청와대 왜 갔나…朴 밝힌 ‘최순실 미스터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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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나도 흥분해 경질했다”…교육장관 ‘황제 라면’ 진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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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부 - 검찰 수사편〉
朴 “왜 더러운 사람 만드냐” 검사 면전서 서류 확 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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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과 눈도 안 마주쳤다, 그녀는 중요한 말은 쏙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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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하나 사실대로 말 안했다” 검찰조사 그날, 박근혜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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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죄, 이미 정해져 있었다” 판사도 놀란 朴 최후 입장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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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 - 수감생활편〉
컵라면 물 가득 부어 끼니…의사는 내 어깨 보고 “참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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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지만 면회도 거절했다…박근혜가 감추고 싶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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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희미한 미소 띤 채 “내일 감옥 가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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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참 면목없고 늘 죄송했다”…당선인 돼 찾아온 ‘특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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