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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3 (금)

[이하경 칼럼] 이재명 신정체제…민주주의의 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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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이하경 대기자


1986년 7월 김영삼 신한민주당(신민당) 고문은 달리는 승용차 안에서 내게 격정적으로 속마음을 토로했다. “김대중(신민당 고문)이는 입만 열면 거짓말이고, 이민우(신민당 총재)는 말을 전혀 못 알아들어요. 미스터 리! 정치하기 너무 힘들어….” YS는 필생의 라이벌 DJ, 대리인 이 총재에게 불만이 많았다.

칠순을 넘긴 이 총재는 양김(兩金)의 훈수에 힘들어 했다. 현안에 대해서 물어보면 항상 “‘논란’을 해봐야지”라고 했다. 하도 시비를 거는 사람이 많아서였을 것이다. 홍사덕 대변인은 확대간부회의 결과를 발표할 때면 인석(仁石·이민우)·소석(素石·이철승)·서강(西剛·김재광)·오봉(晤峰·이중재)·후농(後農·김상현)·일민(一民·이기택)·온산(溫山·최형우)의 발언을 빠짐없이 전달했다. 당은 양김 말고도 사공이 많은 배였다. 이 총재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우황청심환을 삼키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다. 이렇게 반목하면서도 끊임없이 타협했고, 합의를 이뤄냈다. 양김은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였지만 동지로서 철저히 협력했다. 독재의 탄압에 맞선 민주 정당의 아름다움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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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민추협 운영위 지도위 연석회의에 참석한 김대중ㆍ김영삼 전 대통령의 모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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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우거질수록 좋다’고 하더니

총선 이어 전대서 반대파 초토화

DJ 대통령, 노무현의 공격도 허용

민심과 멀어지면 집권은 어려워

집권 민정당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충성하는 사당(私黨)이었다. 반면에 신민당은 통제되지 않는 백가쟁명의 노선 투쟁으로 늘 어수선했고, 갈등과 열망으로 들끓었다. 눈치보지 않는 말의 자유가 넘쳤고, 민주주의의 원초적 박동이 느껴졌다. 그 에너지를 밑천으로 창당 한 달도 안 돼 85년 2·12 총선에서 기적처럼 67석을 거머쥐어 제1 야당이 됐다. 관제 야당 민한당(35석), 국민당(20석)을 압도했고, 야권을 통합해 103석의 거대 야당으로 우뚝 섰다. YS가 목숨을 건 23일간의 단식으로 범야권을 결속시켰고, DJ가 총선 나흘 전에 암살당할 각오로 망명지 미국에서 귀국했기에 펼쳐졌던 드라마였다.

신민당은 마침내 87년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해 전두환 독재를 종식시켰다. YS와 DJ는 민주주의 이행 과정을 원만하게 관리한 노태우 대통령에 이어 차례로 집권해 이 나라 민주주의를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올려놓았다. 과정에서는 직선제를 관철할 것인가, 내각제로 타협할 것이가의 문제로 치고받고 싸워 바람 잘 날 없었다. 이 총재가 “민주화 조치가 선행되면 내각제를 수용할 수 있다”는 ‘이민우 구상’을 밝혔다가 제명되는 아픔도 겪었다. 그러나 다양한 목소리가 분출하면서 잠들었던 민심을 깨워 흔들었고, 민주주의의 새 역사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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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 대통령은 1987년 6월 항쟁 직후 '6·29 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인 뒤 그 해 12월 13대 대선에서 당선됐다. 사진은 1993년 기자회견 하는 노 전 대통령 모습.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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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더불어민주당은 정상이 아니다. 이재명 대표를 비판하면 ‘국민의힘 첩자’를 의미하는 ‘수박’으로 몰린다. 수박은 겉은 푸르지만 속은 붉다. 민주당의 상징색은 파란색, 국민의힘은 빨간색이다. ‘수박’은 공안기관에서 우파로 위장한 ‘빨갱이’를 색출할 때 사용하던 은어(隱語)였다. 이게 제1 야당의 일상어가 된 현실이 기가 막히다.

이 대표는 총선에 이어 전당대회에서도 반대파를 초토화시켰다. 85%의 몰표를 쓸어담았고, 당헌·당규까지 고쳐 1인 숭배의 신정(神政)체제를 구축했다. 그는 7개 사건, 11개 혐의로 4개의 재판을 받고 있다. 10월에는 선거법 위반과 위증교사 사건의 1심 판결이 기다린다. 민주당은 ‘개딸’을 앞세워 판사 탄핵운동으로 사법부를 겁박하고 있다. 그러나 단 한 개 혐의라도 유죄가 확정되면 그의 대선 출마는 물건너간다. 이 위태로운 구조가 개인 사법리스크를 막기 위한 사당화(私黨化)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이 대표는 “‘이재명 단일 체제’라 비난받을 정도로 (당이) 너무 한쪽으로 몰리는 게 약간 걱정”이라며 “숲은 우거질수록 좋고, 경쟁은 많을수록 좋다”고 했다. 영혼 없는 립서비스다. 최고위원 경선에서 1위를 달리던 정봉주 전 의원은 ‘이재명 팔이’를 비판했다가 ‘개딸’들의 공격을 받고 낙선했다. ‘개딸’들은 “(당의) 확장을 막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행태를 배격하자”는 영상 축사를 보낸 문재인 전 대통령까지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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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더불어민주당 신임 지도부를 선출하기 위해 서울 올림픽공원 KSPO돔에서 열린 전국당원대회에서 일부 당원들이 정봉주 최고위원 후보의 사퇴를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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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는 YS가 발굴한 아웃사이더 노무현을 해수부 장관으로 발탁했다. 부산 국회의원 출마를 앞둔 노무현이 겁도 없이 “김대중을 까면 경상도에서 빨리 뜰 수 있다”고 들이대자 현직 대통령인 자신에 대한 공격을 허용했다. 통 크게 비주류를 품어서 불가능해 보였던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 이재명 민주당은 거꾸로 비주류를 절멸시키고 강성 지지층에 둘러싸여 민심과 멀어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집권하기 어려울 것이다.

민주주의의 첫 단계는 갈등의 현재화(顯在化)다. 반대파의 불편한 의견을 들어야 대화와 타협이 가능하다. 여당과 협력해 민생을 챙길 수 있다. 정권의 사소한 허물까지 들춰내 악마화하는 것은 잘못이다. 자신을 부당한 수사의 희생자로 부각시켜 방탄 단일대오를 유지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결과는 정쟁이고 피해는 국민이 본다. 비주류의 씨를 말리는 정당은 교조의 노예이고, 민주주의의 불청객이다. 동토(凍土)에서 민주주의를 만개(滿開)시켰던 제1 야당의 타락은 비극 그 자체다.

이하경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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