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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4 (토)

"에어매트보다 안전한 완강기"라면서… 1999년산, 뽑히는 지지대 '관리 엉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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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전 준공된 숙박업소 완강기 실태]
소급 적용 안 돼 미설치, 부실 제품 수두룩
업소 13곳 살폈더니 정상설치는 단 한 곳
관리·감독 강화 및 소급 적용, 사용법 숙지
한국일보

26일 서울 시내 한 숙박업소의 완강기. 제조연월 1999년 3월로 기재돼 있다. 이정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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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호텔. 프런트에 부착된 소방시설 자체 점검표에는 분명 '이상 없음' 문구가 적혀있었다. 그러나 객실엔 반드시 부착해야 하는 완강기 표지판이 없었고, 완강기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 금고 위에 방치돼 있었다. 또 간이완강기를 설치하는 지지대는 미검정 제품으로 한눈에도 헐거워 보였고, 실제 손으로 살짝 돌리자 쉽게 뽑혔다.

# 역삼동의 또 다른 한 모텔 3층 객실의 경우 천장이 낮아 완강기 지지대를 조립할 수가 없었다. 완강기가 비치된 함도 높은 곳에 있어 뭔가 밟고 올라가지 않으면 꺼낼 수 없는 구조였다. 겨우 꺼낸 완강기 함은 설치 후 한 번도 만지지 않은 듯 잔뜩 먼지를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함에 표시된 제조연도는 무려 25년 전인 1999년이었다.

7명의 사망자가 나온 경기 부천 호텔 화재와 관련해 객실 내 완강기로 대피했다면 피해가 줄었을 거란 관측이 나온다. 5층 이상 고층 건물의 경우 에어매트보다 완강기 이용이 안전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용법을 배우려는 시민도 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일보 현장 취재 결과 완강기가 제대로 설치된 숙박시설은 드문 것으로 나타났다. 불이 날 경우 제2의 참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소방당국의 철저한 관리·감독이 필요해 보인다.

완강기 있는데 지지대는 없고….

한국일보

26일 숙박업소에 설치된 미검정 간이완강기 지지대. 살짝 힘을 줘 당기자 벽에서 분리됐다. 이정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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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한국일보가 서울 시내 숙박업소 13곳을 둘러보니 소방시설법 등 관련 규정에 맞게 정상적으로 객실 내 완강기가 설치된 업소는 단 한 곳에 불과했다. 준공 시점이 부천 호텔(2004년)과 비슷하거나 그 이전인 건물을 대상으로 살펴본 결과다.

현행법상 숙박시설은 층마다 피난기구(미끄럼틀, 완강기 등)가 한 개 이상 있어야 하고, 추가로 모든 객실마다 완강기나 2개 이상의 간이완강기를 설치해야 한다. 그러나 13곳 중 1990년대에 준공된 3곳은 객실에 완강기가 아예 없었다. 복도에도 피난기구가 설치돼 있지 않거나 있어도 창문이 창살로 막혀 무용지물이었다. 해당 규정이 2004년도부터 시행돼 소급 적용되지 않은 탓이다.

객실 내에 완강기가 설치된 10곳 중 9곳도 허술한 관리로 정상 사용이 어려웠다. 먼저 완강기를 설치할 수 있도록 버텨주는 지지대의 경우 4개 이상의 앵커볼트로 고정하는 방식의 승인 용품을 사용해야 하는 규정을 어긴 채 고정 고리 형태인 업소가 7곳이나 됐다. 미검정 지지대는 제대로 고정되지 않았고, 조금만 힘을 가하면 쑥 뽑혔다. 또 완강기는 있지만 지지대가 없는 업소도 있었다.
한국일보

서울의 한 숙박업소 객실에 완강기 2대가 의자에 가려진 채로 비치돼있다. 완강기 위치를 알리는 표지판도 없다. 오세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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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기준과 맞지 않는 부실 완강기도 여럿이었다. 2012년 11월부터 완강기 최대 사용 하중이 150㎏으로 강화됐는데 과거 기준인 100㎏에 불과한 업소가 8곳이나 됐다. 이 가운데는 1999년에 만들어진 제품도 있었다. 완강기 교체 주기는 5~10년이지만 의무가 아닌 권장인 탓에 강제성이 없다는 한계가 있다. 이 밖에도 창문 크기가 탈출이 어려울 정도로 작거나 아예 열리지 않는 업소도 있었다. 또 완강기를 설치한 장소 인근 잘 보이는 곳에 표지를 부착해야 하지만 안 지켜진 업소도 수두룩했다. 불이 나는 위급 상황에서 과연 완강기를 찾을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완강기 기준 소급 적용 필요"


완강기가 제대로 설치됐는지 소방당국의 철저한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노후 건물에도 완강기 설치 기준을 소급 적용할 수 있도록 정부나 지자체 차원의 지원도 뒤따라야 한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완강기는 쉽게 설치 가능하고 큰 비용이 들어가지 않으니 오래된 건물도 현행 기준을 소급 적용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했다. 높은 벽을 타고 내려오는 게 평범한 시민들에게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인 만큼 완강기 숙지법 계도, 홍보도 강화돼야 한다. 공하성 교수는 "몸에 벨트를 매고 천천히 내려올 수 있는 완강기는 제대로만 사용할 수 있으면 훨씬 안전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일보

완강기 사용법 6단계. 그래픽=김대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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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운 기자 cloud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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