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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4 (토)

50년간 한국 현대미술 모판 깐 일본 화랑에 ‘인연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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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일본 도쿄 시내 긴자에 있는 도쿄화랑에서 지난 24일부터 시작된 최명영 작가의 개인전 현장의 모습. 2016~19년 검은색과 푸른 계통 안료로 작업한 ‘평면조건’ 대작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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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하면서도 따듯한 기운이 감돌았다.



최명영(83) 작가의 추상그림들은 양가적이다. 어울릴 수 없는 느낌들을 함께 머금고 있다. 푸른색, 검은색, 회색, 진홍색 등을 바탕에 바랜 듯한 색조로 칠하고 수직 수평의 기하학적 격자 형상으로 갈무리한 화폭은 품이 넓어 보인다. 이런 색과 형의 얼개를 띠고서 삭막한 백색 전시장 들머리에서 벽을 돌아 안쪽으로 공간을 달리하면서 계속 펼쳐지는 그림들이 눈에 주는 감각은 모순적이지만 온화하고 부드럽다.



지난 24일 낮 서울을 능가하는 폭염과 습도로 숨이 막히는 일본 도쿄 도심 긴자 거리를 거닐다 한 빌딩 4층 전시 공간에 들어갔다. 거기서 한국 단색조회화(모노크롬)의 원로 대가인 최 작가의 구작과 근작, 신작들을 두루 만났다. 20여년 만에 마련했다는 작가의 일본 개인전(9월28일까지)이 열린 이곳은 바로 도쿄화랑. 현지에서 손꼽히는 명문 화랑으로 1960~70년대 일본 현대미술운동 ‘모노하’(物派)와 70년대 한국 단색조회화(모노크롬)의 유력한 발표 무대였다. 영리에 구애받지 않고 세키노 노부오, 이우환, 기시오 스가 등 모노파 작가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했고, 한국 작가들과의 교류전도 줄곧 이어온 게 이 화랑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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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의 최명영 작가. 더페이지갤러리 제공


특히 1975년 박서보, 서승원, 허황, 이동엽, 권영우 작가의 ‘5인의 한국 작가와 다섯가지의 백색’전을 열어 한국 단색조회화를 처음 본격적으로 부각시키는 계기를 만든 것은 미술사적 사건이었다. 이 유서 깊은 화랑에서 한국 모노크롬의 또 다른 주역이자 화단의 선비로 꼽히는 최명영씨가 신구작을 망라한 회심의 전시판을 차린 것은 의미가 가볍지 않다. 지극히 단순한 구도의 모노크롬 추상그림 12점만이 나왔는데도 40년 이상 터울을 지닌 구작과 근작, 신작들의 도상이 울려내는 긴장감과 세월의 깊이가 묵직하게 와닿았다.



작가는 1960년대 기존 화단을 지배한 추상표현주의(앵포르멜)에 맞선 신감각파 추상화의 기수였다. 1964년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1967년 전위미술운동의 시발이 된 청년작가 연립전에 가담했던 그는 1969년 발족한 한국아방가르드협회(에이지그룹)의 초기 구성원으로서 기하학적 추상을 이끈 주역이었다. 70년대 이후 그는 ‘평면조건’ ‘수직 수평’ 등의 연작을 내놓으면서 회화의 본질인 평면의 가능성을 천착하는 작품들을 줄곧 창작해왔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70년대 이래 지금까지 애착을 갖고 지속적으로 작업해온 ‘평면조건’ 연작의 70~80년대 구작들과 2000년대 이후 근작, 신작들을 한자리에 배치했다. 초기 작품은 손가락 지문의 흔적이나 종이 쪽들의 자취를 줄톱을 써서 캔버스에 남기는 데서 착안해 가지를 쳐나갔다. 그뒤 롤러를 쓰고 그림물감을 겹쳐 발라 평면 위에 두께의 요소를 더한 화면이 형성됐고, 1980년 이후에는 수직선과 수평선을 반복해 그려 화폭을 덮는 방식으로 평면성을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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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들머리에 나온 최명영 작가의 1980년작 ‘평면조건’. 종이 위에 실크스크린으로 격자 구조에 담담한 색조를 겹쳐올린 그만의 구축적인 회화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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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인 단색조 대가 정상화의 영향을 받아 격자 창살 구조에 담백하고 순한 빛의 색조를 내려앉힌 1980년작 ‘평면조건’으로 시작해 올해 신작 4점까지 이어지는 출품작 10여점은 푸른빛과 검은빛, 그리고 인주를 연상시키는 진홍빛 계열 원색으로 그린 기하학적 모양과 선의 형태를 되풀이하면서도 작품마다 화면에 미세한 결의 차이를 드러내는 최명영표 모노크롬 회화의 특징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박서보, 하종현의 벽지풍 대작들을 흔히 떠올리는 단색조회화를 두고 흔히 노장사상이나 그리는 행위의 반복을 통한 수행의 성격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최 작가는 맥락이 다르다. 매끄럽지 않고 불균질한 색조 화면에 따듯한 기운이 퍼지는 그의 추상화들은 산업화 사회로 진입하던 1960년대 후반 한국 현실을 직시한 동시대 젊은 예술가들의 조형의식에서 비롯되었다. 기계문명과 매스미디어의 고도화, 획일적인 현대 도시에 조응하는 일단의 대안적 어법이었고, 이후 이런 일관된 조형의식을 따라 전개된 작업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술사가인 김영순씨는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 정부의 경제개발계획과 대도시 개발로 급변한 동시대 한국 시각문화의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하면서 시대의 미학을 구현한 것이 바로 화폭 위에 사물의 흔적과 수직 수평 구조를 풀어놓은 최 작가의 기하학적 추상 작업”이라고 풀이한다.



실제로 이날 현장을 찾은 일본 평단 전문가들도 단색조회화 작가로서 그의 작업 틀이 지닌 지속성과 개성을 높이 평가했다. 모리미술관 관장을 지낸 난조 후미오는 “다소 딱딱하고 획일적인 단면을 보여주는 박서보류의 단색조 작업에 비해 최 작가의 작업은 단색조회화의 전형적 특징을 지니면서도, 인간적인 따듯함이 서린 유연하고 서정적인 추상세계란 점이 돋보인다”고 평했다. 일본 모노하의 대표적 평론가로 50여년간 글을 써온 미네무라 도시아키도 “전시를 보니 30년 넘게 패턴화의 추상을 추구하면서도 계속 박진감 넘치는 긴장감을 유지하는 게 놀랍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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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타마현립 근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모노하 작가 요시다 가츠로의 회고전 전시장 일부. 종이의 네 귀퉁이를 돌로 내리누르거나 밝기가 다른 전구들을 수직 구도로 대비시키고 매달린 큰 나무막대 아래 돌을 매단 설치작업들이 나온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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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70~80년대 그와 함께 한·일 작가 교류전에 참여해 교감하면서 일본 모노하를 주도했던 작고 작가 요시다 카츠로(1943~1999)의 전시(9월23일까지)도 도쿄 북쪽 근교 사이타마현립 근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회고전 전시장엔 종이의 네 귀퉁이를 돌로 내리누르거나 밝기가 다른 전구들을 수직 구도로 대비시키고 큰 나무 막대 아래 돌을 매단 초창기 설치작업들과, 흑연 묻힌 손가락과 몸을 문지르고 움직여 작가 자신을 화면의 평면 상태에 밀착시키려 한 말년의 작품들을 선보이는 중이다. 사물의 형상을 뜨는 탁본과 전사기법을 즐겨 활용했던 고인의 작업들은 사물 그대로의 상태를 대면시켜 존재의 실체를 드러내려 했던 현대미술 사조 모노하의 전형적인 스타일을 보여준다. 이는 한편으로 촉감과 교감을 중시했던 70~80년대 한국 전위미술, 추상회화의 정신과도 상통한다는 점에서 최 작가의 도쿄 전시회와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를 가진다고 할 만하다. 들머리엔 1970년 서울판화비엔날레 대상 수상작인 도시거리의 행인들 사진을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떠서 묘사한 판화 연작들도 나와 있어 그가 한국과 맺은 각별한 인연도 새삼 반추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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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서울판화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한 요시다 가츠로의 판화 작품. 사이타마현립미술관의 회고전 서두에 내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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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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