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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4 (토)

또 도발했다… 총재님, 혹시 ‘뉴진스님’이세요? [이영태의 초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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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 농산물 이어 이번엔 대입
영역 가리지 않는 논쟁적 제언
절간 이미지 탈피한 파격 행보
중앙은행 역할 변화 가능할까


한국일보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7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한은 공동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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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이 또 하나의 도발적인 보고서를 냈다. 이번엔 대입 제도 개선 관련이다. 제안은 파격적이다.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를 비롯한 상위권 인서울 대학들이 자발적으로 지역별 인구에 비례해 학생들을 선발하자고 한다. 서울에 집중되고 있는 입시경쟁을 지역적으로 분산시키면 수도권 인구집중, 서울 주택가격 상승, 저출산과 만혼, 그리고 사회이동성 확대까지 다양한 사회문제를 풀 수 있을 거라는 진단이다. 반응들이 요란하다. 이런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극찬에서부터,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냉소, 그리고 교육 현실을 너무 모른다는 혹평까지.

보고서 앞단엔 의례적이지만 이렇게 적혀 있다. ‘본 자료의 내용은 한국은행의 공식 견해가 아니라 집필자 개인의 견해라는 점을 밝힌다’고. 하지만 한은 내부 인사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공식 견해는 아닐지 몰라도 이창용 총재의 의중이 충실히 반영된 보고서임은 분명하다. 최근 화제가 된 보고서 하나하나 이 총재가 오랜 기간 고민해온 주제들을 담고 있다고 한다. “다 계획이 있었구나”라는 영화 ‘기생충’의 대사처럼, 사회에 논쟁적인 의제를 던져보겠다고 준비단계부터 철저히 계획된 보고서들이라는 얘기다. 이 총재가 취임 초부터 누누이 강조해온 ‘시끄러운 한은’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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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줄이 쏟아지는 ‘시끄러운 보고서’


지난 3월 한국은행이 발간한 논란의 보고서를 기억할 것이다. ‘돌봄 서비스 인력난 및 비용 부담 완화 방안’이란 제목이었다. 간략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가뜩이나 심각한 돌봄 인력난은 급속한 고령화로 심화될 것이다. 인력난 완화를 위해 외국인 노동자를 적극 활용하되, 비용 부담을 낮추는 방안을 함께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돌봄업종의 최저임금을 낮게 차등 적용하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최저임금 차등 적용 논의에 불을 지핀 보고서였다. 오래전부터 이를 외쳐온 경영계는 쌍수를 들어 환호했고, 노동계는 반노동적 발상이라며 격하게 반발했다. 한은 역사상 노동계와 시민단체가 한은 본관 앞에서 시위를 벌인 것은 유례없는 ‘사건’이었다.

단초가 된 건 노모를 위해 돌봄 인력이 필요했던 이 총재가 직접 체감한 고민들이었다고 한다. 처음엔 육아 돌봄에 포커스가 맞춰졌지만, 노인 돌봄까지 확장된 것도 이런 영향이었다. 올해 최저임금위원회에서 최저임금 차등 적용이 불발되긴 했지만, 대통령실과 여당이 다시 만지작거릴 정도로 큰 쟁점이 되고 있는 데는 이 보고서 영향이 상당했다.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렇게 중앙은행 보고서가 큰 반향을 일으켰던 적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6월 물가 보고서(우리나라 물가 수준의 특징 및 시사점)도 ‘사과 수입 늘리자’라는 아주 민감한 제언으로 시끄러웠다. 보고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과 비교를 해보니 농축산물 물가가 유독 높았다. 대표적으로 사과는 무려 279%나 비쌌다. 정부가 농가 보호를 위해 사과 등 농산물 수입에 적극적이지 않은 결과다.’ 이 총재가 직접 나서서 이런 논쟁적 질문을 던졌다. “생산자 보호를 위해 지금 같은 정책을 계속할 건가요, 수입을 통해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건가요?”

한은이 보고서를 발표한 바로 다음 날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농업 분야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했다”며 조목조목 반박했고, 곧 이어 한은 보고서 작성에 참석했던 이윤수 서강대 교수가 재반박하는 등 공방이 뜨거웠다. 한쪽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긴 어렵지만, 농민 눈치만 보며 수면 아래 있던 농산물 수입 개방에 대한 논의를 공식 테이블에 올려놓은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번 대입 보고서도 후폭풍이 적지 않을 것이다. 대학들의 학생 선발 자율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거나, 서울 학생 역차별로 공정성을 해친다는 지적이 벌써 나온다. 지방 유학으로 대학에 입학한 뒤 곧바로 상경하는 얌체족을 넘어, ‘위장전입’까지 기승을 부릴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구더기 무서워 장 담글 생각조차 않아선 곤란하지 않겠나. 이 총재의 발언은 더욱 도발적이다. “SKY 교수님들이 결단만 해주시면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한은이 금리를 조정하는 것보다 수도권 부동산 가격이 더 안정될 거라 믿습니다.” SKY 대학 총장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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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 엠블럼


▶”중앙은행이니까 가능하다”


지난 6월 창립 기념사는 이 총재가 왜 구조개혁 문제에 천착하며 한은을 시끄러운 조직으로 만들려 하는지 잘 설명한다. “저출산, 고령화, 지역불균형과 수도권 집중, 연금고갈과 노인빈곤, 교육문제, 소득·자산 불평등, 노동시장 이중구조 등 그간 누증되고 심화돼 온 여러 구조적 문제들 앞에서 우리의 연구영역을 통화정책의 테두리 안에만 묶어둘 수는 없다." 그는 "논쟁과 비난을 두려워하며 피하기만 한다면 늘 그 자리에 머물 뿐 발전적 변화는 요원하다"고도 했다.

오지랖 넓다는 비판도 있다. 분야별 전문 연구기관이 있는데 한은이 굳이 비경제적인 영역까지 손을 대는 게 적절하느냐는 것이다. 노동, 농업, 교육 등 각각의 전문연구기관과 비교할 때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뇌피셜’(객관적 근거없는 추측) 수준의 단편적 접근에 불과할 수 있다는 평가도 있을 수 있다. 자칫 어설픈 보고서는 중앙은행의 신뢰를 갉아먹는다. 한은 조사국장을 지냈던 장민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정치한 분석을 건너뛰고 주장에만 힘이 실리는 건 곤란하다”고 했다.

하지만 중앙은행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이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외부인사로 드물게 물가보고서 작성에 함께 참여했던 이윤수 서강대 교수는 “이번에 같이 일해보면서 깜짝 놀랐는데 한은 연구진들의 능력이 매우 뛰어나더라”며 “한은이 다른 어떤 조직보다 관련 부처 의견에 휘둘리지 않고 중립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물가보고서를 두고 농식품부 장관과 공개적인 공방을 벌인 것도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에 대해 올바른 해답을 찾아나가는 건강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도 “정부로부터 독립적 위치의 중앙은행이 장기적 안목으로 현안을 바라보는 건 큰 의미가 있다”며 “의제를 던지고, 반론이 나오고, 추가 연구를 하는 과정은 더욱 장려돼야 하는 측면”이라고 했다.

사실 ‘정부 출장소’라는 오명 탓에 몸을 극도로 사려온 한국은행과 달리 선진국 중앙은행들은 일찌감치 시끄러운 행보를 해왔다. 석병훈 이화여대 교수는 “미국은 연방준비제도뿐만 아니라 지역 연방은행들도 사회적 현안에 대해서 경제학자 시각으로 다양한 보고서들을 생산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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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2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본관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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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금리 결정 한 번에 인건비 300억 원?


지금은 인기가 살짝 시들긴 했지만 한은은 문과 취업준비생들의 취업 희망 1순위로 꼽히던 곳이다. 2,400명 안팎의 임직원은 한 명 한 명이 국내 최상위 인재다. 박사 학위 소지자만 215명, 10명 중 1명꼴이다.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인재 집합소’다.

막상 일반인들은 한은이 뭘 하는 곳인지 잘 모른다. 그저 기준금리를 올리고 내리는 일이 중앙은행 역할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상당수다. 표면적으로 보여지는 건 1년에 8차례 금리 결정을 하는 회의이니 그럴 법도 하다. 그런데 임직원 평균 연봉이 1억 원을 웃돈다. 연 2,400억 원의 인건비로 8번의 금리 결정을 하는 셈이다. 금리 한 번 정하는데 인건비가 300억 원이라는 우스개 소리까지 있다.

한은이 하는 일이 어디 금리정책뿐이겠는가. 통화정책만 해도 금리 외에 다양한 수단이 있고, 금융시장과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감시 기능을 하고, 지급결제시스템을 운영하고 모니터링한다. 국내외 경제 전반에 대한 조사연구와 통계 작성, 세계 각국 중앙은행 및 국제금융기관과 긴밀한 협력도 해야 한다. 화폐 발행과 관리도 당연히 한은의 역할이다.

그럼에도 한은이 오랜 기간 ‘절간’에 비유되고 ‘한은사(寺)’란 별칭까지 붙은 건 스스로의 책임이 크다. 여기엔 단순히 조용하다는 걸 넘어 폐쇄적이고 존재감이 없다는 부정적 시각이 담겨 있다. 장민 전 조사국장은 “좋은 연구들은 많이 나오는데 너무 조심스러워하니까 밖에 내놓지 못한 것들이 꽤 있었다”며 “금리 외의 이슈들에 대해서는 스스로 담을 쌓은 측면도 있었다”고 말했다.

국정감사에서도 단골 지적사항이었다. “한은이 국내 최고 경제두뇌집단인데 경제 현안에는 제 목소리를 낼 때가 드물고 발간하는 보고서도 두루뭉술하다.”(박명재 전 자유한국당 의원) “한은이 통화정책을 위한 연구 토양을 마련하는 작업과 역할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윤희숙 전 국민의힘 의원)

서 말의 구슬을 보배로 꿰자는 게 이 총재의 생각이다. 한 전직 한은 간부는 최근 불교계에 큰 변화를 몰고 온 ‘뉴진스님’에 빗댔다. “뉴진스님이 조계종에 엄청난 활력을 불어넣었다면 이 총재는 한은에 지금껏 없었던 변화를 몰고 온 것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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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 본관 전경. 한국은행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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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퉁불퉁해도 의미 큰 시도들


변화는 단지 보고서에만 있는 게 아니다. 가장 의미있는 시도는 포워드 가이던스(forward guidance), 그러니까 향후 금리방향 사전 안내제 도입이다. 이전까지는 시장참가자들이 향후 금리 전망에 대해 얻을 수 있는 힌트는 총재의 말, 그리고 금통위원의 소수의견뿐이었다. 지나치게 폐쇄적이었다. 이 총재가 과감히 틀을 깼다. 2022년 10월 금통위부터 본인을 제외한 금통위원 6명이 제시한 향후 3개월간 최종금리 수준을 구두로 공개했다.

말도 많았다. 작년 1월 기준금리를 연 3.50%로 올린 이후 지금까지 금리 동결 행진을 이어오고 있지만, 작년 내내 ‘3.75%로 인상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줄기차게 시장에 보내왔다. 심지어 작년 5월, 7월, 8월 세 차례의 금통위 회의에선 금통위원 전원이 향후 3개월 금리를 3.75%라고 제시했다. 그럼에도 금리 인상은 없었다. 한은이 매파적 진단을 하면서도 정부 눈치만 보며 ‘공갈포’만 쏜다는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금리인상기에 실탄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탓에 금리인하기로 접어든 지금 사용할 실탄이 별로 없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가자는 이들은 거의 없다.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금통위원들의 생각을 시장과 공유하는 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견이 압도적이다. 오히려 “금통위원들이 대외적으로 발언하는 자리가 더 많아져야 한다”(강승원 NH투자증권 연구위원), “포워드 가이던스를 좀 더 강화하고 금통위 의사록에 발언자의 실명을 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다”(공동락 대신증권 연구원) 등 더 깊은 소통을 원한다.

내부적으로도 이런저런 변화가 많았다. 금통위원과 임직원이 주요 현안을 두고 토론(주간현안포럼)하고, 이 총재 등 경영진이 조직문화 등에 대해 직원들의 질문에 현장에서 직접 답변(타운홀미팅)하고, 취임 초기 직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익명게시판(총재께 바란다)을 운영하는 등의 시도들이다. 물론 한 꺼풀 벗겨보면, 타운홀미팅에 참석한 직원들이 입을 꾹 닫고 있어 난감한 상황이 연출되는 등 순탄하지만은 않다. 정작 젊은 직원들은 한때 ‘신의 직장’이라 불렸던 한은의 낮은 처우에 불만이 가득하다고 한다. 한은 한 임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속해있는 조직이 대외적으로 주목받는 것에 대해 자긍심은 높은 듯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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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는 22일 통화정책방향 결정회의에서 기준금리를 현 수준으로 유지했다. 지난해 2월부터 이어진 13회 연속 동결 행진이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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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중요한 건 본업이다


뉴진스님이 아무리 화제를 일으킨다 한들, 교리가 흔들리면 반짝 인기에 그칠 수밖에 없다. 한은도 그렇다. 본업인 금리정책에 대한 책임은 막중하다. “지난해 금리를 충분히 올려놨어야 하는 때에 올리지 못하면서 엄청난 후폭풍을 겪고 있다”(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싸늘한 진단도 있다.

한은은 당시보다 더 중대한 시험대에 서 있다. 지금 대통령실까지 나서서 금리 인하를 노골적으로 압박하지만 자칫 부동산 가격과 부채에 기름을 부을 수 있다. 이러기도 저러기도 힘든 곤혹스러운 딜레마 상황이다.

절대 양보해선 안 될 중앙은행 독립성이 종종 의심을 받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이른바 ‘F4’ 회의(경제금융수장회의)에 참석하며 “우리는 원팀”을 말하는 게 적절한지 논란도 있다. 과거처럼 아예 접촉조차 않는 게 독립성을 지키는 길이라 여기는 건 시대착오적이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분명 있다. 하준경 교수는 “충분히 소통을 하되 독립적 의사 결정을 한다는 신뢰를 시장에 주는 게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27일 금리 인하를 압박하는 대통령실을 향한 직설적 발언은 의미가 크다. "왜 금리 인하를 망설여야 할 만큼 높은 가계 부채와 수도권 부동산 가격과 같은 구조적 문제에 빠지게 됐는지에 대한 성찰은 부족해 보인다." 대통령실은 물론 시장에도 분명한 시그널이 됐을 것이다.

하나 더, 지금의 ‘시끄러운 한은’이 이 총재 임기 4년의 한시적인 성과물에 그쳐서는 안 된다. 임기 반환점을 돈 지금, 반짝 화제보다는 한은의 체질 개선에 힘을 쏟아야 할 이유일 것이다.

이영태 논설위원 yt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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