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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6 (월)

방송법, ‘박성중 법안’으로 협상 물꼬 트자 [저널리즘책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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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공영방송(한국방송·문화방송·교육방송) 이사들이 지난 7월 서울 마포구 상암동 문화방송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불법적인 공영방송 이사 선임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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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규 | 저널리즘책무실장



“(한국방송)공사의 이사를 추천하는 방송통신위원회 위원 구성 방식이 정치적 중립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공사 사장의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실정임. 이에 공사의 최고의결기관인 이사회 구성과 사장 선임 절차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보장하는 법적 장치를 마련함으로써….”



한국방송(KBS) 이사 전원을 대통령·여당 추천 위원이 다수인 방통위가 선임하도록 한 방송법을 개정해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취지의 제안이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누구의 주장일까. 요즘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공영방송 쟁탈전’ 양상에 비춰보면, 당연히 더불어민주당의 요구일 것 같다. 뜻밖에도 이 제안의 주인공은 국민의힘 전신인 미래통합당 의원들이다.



2020년 8월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야당 간사이던 박성중 미래통합당 의원은 방송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서두에 인용한 구절은 이 법안의 ‘제안 이유’ 가운데 일부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법안의 제안 이유가 2016년 민주당이 당론으로 발의했던 방송법 개정안과 베낀 것처럼 유사하다는 점이다. 여야가 7 대 6으로 공영방송 이사를 추천하고 사장 선출 때 특별다수제(재적 이사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의결)를 도입하는 것을 뼈대로 한다는 점도 같다.



집권 세력의 공영방송 장악을 막기 위해 공영방송 이사회의 야당 추천 몫을 늘리고 특별다수제를 도입하자는 법안은 10여년간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여러차례 국회에 제출됐다. 그러나 야당 때는 방송법 개정을 요구하다 정권만 잡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를 바꾸는 일이 반복됐다. 공영방송을 둘러싼 내로남불에는 여야가 따로 없었다. ‘이사진 물갈이를 통한 경영진 교체’라는 똑같은 행태를 두고, 야당 시절엔 ‘방송 장악’이라고 비판하고 여당이 되면 ‘방송 정상화’라고 강변했다.



내로남불로 귀결되긴 했지만, 정치권이 야당 시절엔 너 나 할 것 없이 방송법 개정안을 내놓았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의 공영방송이 집권 세력의 손아귀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여야 모두 절감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상식적인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정치권력에 철저히 예속된 공영방송 지배구조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돼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은 방송 장악 폭주로 야당과 언론계의 거센 비판을 사고 있지만, 윤석열 대통령도 후보 시절에는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약속했다. 윤 대통령은 대선 기간인 2021년 11월 한국방송 미디어비평 프로그램 ‘질문하는 기자들 큐(Q)’에서 ‘여야가 공영방송 이사 7 대 6으로 추천, 이사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사장 선출’ 방안을 제시했다. 민주당의 2016년 당론 법안, 박성중 의원의 2020년 법안과 뼈대가 같다.



물론 민주당이 현재 추진 중인 ‘방송 3법’이 정치권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학계와 직능단체, 시청자 등 다양한 주체가 공영방송 이사 선임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더 나은 대안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 방안으로는 여당을 설득하기가 불가능하다. 국민의힘은 ‘방송 3법’을 ‘공영방송 영구장악법’이라고 깎아내리며 대화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윤 대통령도 야당의 일방 처리를 이유로 이미 두차례나 거부권을 행사했다. 민주당은 ‘방송 3법’ 재추진 방침을 밝히고 있지만, 또 거부권에 가로막힐 게 불보듯 뻔하다.



현실성 없는 강경론보다는 실사구시의 정신이 필요하다. ‘박성중 법안’으로 협상의 물꼬를 터보면 어떨까. 민주당이 내놓은 법안을 뒤로 물리고 특별다수제를 대화의 출발점으로 삼자는 얘기다. 여야 모두 과거에 제시한 대안이니, 국민의힘도 무턱대고 반대하지는 못할 것이다. 실제 엄태영 국민의힘 의원은 당 비상대책위원을 맡고 있던 지난 6월 ‘방송 3법 저지를 위한 연석회의’에서 “민주당이 줄곧 주장해온 특별다수제를 통해서 여야가 모두 인정하는 사람이 공영방송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별다수제를 도입하면 야당도 동의할 만한 중립적인 인물이 공영방송 사장이 될 가능성이 크다. 박민 한국방송 사장 같은 최악의 ‘낙하산 사장’이 공영방송에 발을 들이는 일은 막을 수 있다. 어떤 정치 세력이 정권을 잡더라도 방송을 장악할 수 없도록 하자는 것이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의 취지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최근 공영방송 제도 개선을 위한 사회적 논의기구 구성을 여야에 제안했다. 지난 7월에도 같은 제안을 했으나 국민의힘이 거부했다. 정치적 중립성이 요구되는 방송 관련 입법은 여야 합의로 이뤄지는 게 옳다. 정권만 바뀌면 여야가 공수를 교대해가며 벌여온 볼썽사나운 공영방송 쟁탈전, 이제 여야 합의로 ‘종전’을 선언하자.



저널리즘책무실장 jk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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