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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6 (월)

‘뉴라이트 교과서’ 평가받는데, 저자들은 “난 뉴라이트 아냐”···왜 이러죠?[뉴스 물음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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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편향된 뉴라이트의 역사관을 신봉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습니다.
- 한국학력평가원 고교 역사교과서 집필진 A씨


지난 2일 한 통의 e메일을 받았습니다. 발신자는 한국학력평가원의 고교 역사교과서 저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저자는 e메일에서 ‘뉴라이트’를 편향적 역사관으로 지적하며 이를 신봉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한국학력평가원의 역사교과서는 친일 인사·이승만 독재를 옹호하고 일본군 ‘위안부’를 축소 서술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식민사관과 식민지 근대화론을 담아 거센 비판이 일었던 과거 ‘뉴라이트’ 역사교과서의 서술 형태, 교과서 구성, 일부 문장구성이 유사하다는 지적도 잇따랐습니다.

이 때문에 역사학계와 역사교사들은 한국학력평가원의 역사교과서도 ‘뉴라이트 계열’ 교과서로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몇몇 저자들이 평소 역사 세미나에 보낸 토론문이나 영상 등에서 ‘뉴라이트’ 계열의 인식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뉴라이트 역사교과서라는 해석은 한층 더 힘을 받았습니다.

경향신문

공개된 새 역사 교과서 내년부터 일선 학교에서 사용할 새 중학교 역사·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검정 결과가 지난달 30일 공개됐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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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된 영문인지 한국학력평가원 저자들은 자신들이 “뉴라이트가 아니다”라고 주장합니다. 또 다른 저자인 배민 부산외대 교수는 지난 4일 조선일보 기고에서 “나의 이런 우파 자유주의 시각은 좌파에 의해 친일파 혹은 뉴라이트(언제부터 이 두 개념이 혼재되어 버렸는지는 나도 모른다)로 낙인찍히고 있다”고 썼습니다.

뉴라이트라는 지적을 부인하는 장면은 정치권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지난달 27일 국회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뉴라이트인가”라고 묻는 신장식 조국혁신당 의원 질문에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논문에서 친일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서술을 했던 박지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또한 국회 질의에 “나는 뉴라이트가 아니다”라고 답했습니다.

2000년대 중반 태동한 뉴라이트는 흔히 일제 강점기 시기 근대적 제도와 문물이 해방 이후 한국 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됐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대표됩니다. 식민지 근대화론과 식민사관에 기반한 친일 옹호, 친기업·반노동, 독재 정권 재평가로도 특징지어집니다. 이는 최근 논란이 된 한국학력평가원의 역사교과서 서술방향과 유사합니다. 그렇다면 ‘뉴라이트를 뉴라이트라 부르지 말라’고 해석되는 최근 역사교과서 저자·정치권 인사들의 ‘뉴라이트 부정론’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뉴라이트 역사교과서 논란을 현장에서 겪고 있는 역사교사들은 극우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를 예로 들어 ‘뉴라이트 부정론’을 설명합니다.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 역사교사는 “교실을 보면 이제 학생들 사이 ‘쟤는 일베’라고 하면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친구이고, 그릇된 생각을 하는 친구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며 “뉴라이트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뉴라이트의 역사 인식이 문제적이라는 관념이 사회에 이미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뉴라이트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본다”고 했습니다. 뉴라이트가 이미 사회적으로 합의된 가치와 원칙을 거스르는 작업을 했고,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시민들 사이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의미입니다.

경향신문

한국학력평가원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담긴 ‘주제 탐구’ 부분에선 친일 인사, 지식인의 행적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묻고 있다. 국회 제공


한국학력평가원 저자들도 한국 사회에서 뉴라이트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파악한 것으로 보입니다. 친일 인사 옹호, 일제강점기 정당화로 논란을 일으킨 역사교과서 저자조차 뉴라이트를 “편향됐다”고 언급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실 편향보다 핵심적인 뉴라이트의 문제는 사회에서 합의된 원칙과 가치를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의 역사를 존중하고, 국가 건설이나 근대화에 공이 있다고 하더라도 독재의 역사를 미화해서는 안 된다는 이 사회의 합의된 원칙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경향신문 9월2일자 사설)는 지적을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맥락에서 뉴라이트 부정론은 일종의 기만술에 가깝다는 분석도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역사학계에선 뉴라이트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회적 시선이 지배적이기 때문에, 역사교과서 채택율을 높이기 위해 저자들이 ‘나는 뉴라이트가 아니다’라는 선언을 했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뉴라이트의 역사 인식이 교묘하게 반영된 ‘순한맛’ 역사교과서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하기 위한 전략”(강성현 성공회대 교수)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한국학력평가원 집필진 일부가 최소 1번 이상 토론문이나 발제문을 제출한 2022년 역사연구원의 세미나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합니다.

“현재의 집필기준에 맞추어 통과될 수 있는 검정교과서를 만들어 놓아야 한다. 양질의 교과서로, 여러 종으로 말이다. ‘기독교계 대안학교용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서 바른 뜻을 마음껏 펼치고, 다음 단계로 그 ‘순한 맛’ 또는 ‘보편적 맛’의 ‘검정교과서’를 내놓는 것이 맞는 순서”
- 역사연구원 제7차 학술세미나 발제문 중(2022년 8월26일)


달리 말하면 저자들이 뉴라이트를 내세우면서 뉴라이트 역사인식을 있는 그대로 역사교과서에 반영하면 교육과정이 제시하는 검정 기준을 통과하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학력평가원 역사교과서 저자인 배민 교수는 2021년 한 유튜브 채널에서 “일제 시대(일제 강점기)를 간악한 일제에 의한 수탈과 착취, 억압, 각종 비윤리적인 만행의 역사라고 쓰는 데 정말 그런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이같은 역사인식이 역사교과서 서술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면 현행 교육과정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할 것입니다.

뉴라이트 계열로 지목받는 이들이 뉴라이트임을 부정하면서 스스로 피해자임을 내세우는 맥락을 들여다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논란이 된 한국학력평가원 역사교과서 저자들은 “나는 뉴라이트가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일부 발언을 짜깁기해 공격하고 있다”, “사상의 자유를 탄압받고 있다”, “나는 단 한 번 (뉴라이트 모임으로 지적 받은) 세미나에 토론문만 보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회가 합의한 가치와 원칙을 흔들려는 시도에 가해지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나는 뉴라이트가 아니다’라고 규정하면서 동시에 정치적 대립구도 속의 피해자임을 내세운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이명숙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은 “마치 정치적인 대립 구도 속에서 자신들이 소수의 피해자인 것처럼 내세우고 있다”며 “지금은 뉴라이트의 핵심 논리가 어불성설이라고 공론장에서 비판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 [사설] ‘뉴라이트’ 교과서 검정 통과, 역사교육 우경화 우려한다
https://www.khan.co.kr/opinion/editorial/article/202409011913001



☞ 새마을운동·반공 정책 일방적 두둔한 역사교과서, 채택률 높이기가 목표?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409011735001


김원진 기자 onejin@kyunghyang.com, 탁지영 기자 g0g0@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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