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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9 (목)

스펙 좋으면 성과도 좋다? 어디 한번 증명해 봐! [視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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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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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졸자 평균 취업 연령은 31세다. 취업이 늦어지면 결혼‧출산 등의 과정도 늦어질 수밖에 없다.[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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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용 시 스펙보다 직무 능력을 중요하게 본다." 지난 십수년간 기업들이 '스펙보다 능력'을 외쳐왔지만 어찌 된 일인지 구직자들의 '스펙 경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스펙 쌓는 데 드는 비용이 월평균 44만원이니 그 부담도 만만치 않다. 첫 직장에 입사하는 평균 나이가 31세라는 점을 감안하면 많은 청년들이 긴 시간을 그저 스펙만 쌓으며 보내고 있다는 얘기다.

# 당연히 고스펙자가 넘쳐나지만 기업들은 "뽑을 인재가 없다"고 아우성이다. 왜 이런 역설적 상황이 펼쳐지는 걸까. 재단법인 '교육의봄'은 "채용 방식을 돌아볼 때"라고 강조한다. 평가에 반영하지 않는 불필요한 스펙을 입사지원서에서 '빼는 것'만으로도 변화를 꾀할 수 있다는 거다.

# 이른바 '스펙 다이어트'가 필요한 한국 채용 시장을 들여다봤다. 더스쿠프-교육의봄 공동기획 視리즈 '스펙, 그 쓸모없는 경제학' 1편이다.

"취업을 위한 스펙을 쌓기 위해 공모전에 참여하려고 해도, 공모전을 위한 스펙이 필요하다." 취업준비생 A씨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이른바 '취업 스펙'을 쌓았다. 그런데도 주위에 '고스펙자'가 넘쳐나는 탓에 취업문을 뚫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과도한 스펙 경쟁'이 한국의 고질병으로 꼽힌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다. 무엇보다 구직자들이 원하는 양질의 일자리가 부족하다. 일례로, 대기업이 차지하는 일자리 비중은 15% (2021년 기준)에도 못 미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2개국 평균(32.2%)의 절반 수준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도 문제다. 통계청에 따르면 대기업 직장인 평균 월소득은 591만원(이하 2022년 기준)으로 중소기업 직장인(286만원)의 두배에 달했다. 상황이 이러니 모두가 "대기업"을 외치며 스펙 경쟁에 뛰어드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닐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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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스펙 경쟁이 커다란 사회적 비용을 유발한다는 점이다. 대기업 취업을 목표로 한 스펙 경쟁은 '영어유치원'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은 성적→좋은 대학→좋은 직장'이 '좋은 삶'으로 귀결되는 듯한 한국만의 공식은 '사교육 시장 과열' '늦은 취업→늦은 결혼·출산'으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높은 스펙을 요구하는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 청년들이 근로 의욕마저 잃고 있다는 건 또다른 문제다. 구직 의사가 없는 '쉬었음' 청년(15~29세) 수가 44만3000명(2024년 7월 기준)으로 역대 최대치를 갈아치운 건 단적인 예다. 그렇다고 취업에 성공한 이들의 만족도가 높은 것도 아니다. 대졸 취업자의 첫 일자리 평균 근속기간은 1년 7개월에 불과하다.

기업도 기업대로 고민이다. 고스펙자들이 넘쳐나지만 정작 원하는 인재를 찾기는 쉽지 않아서다. 한국경제인협회가 실시한 '2024년 하반기 대기업 채용동향·인식 조사' 결과, 대기업들은 신규 채용에서 겪는 가장 큰 애로사항으로 '적절한 인재를 찾기 어려움(35.5%)'을 꼽았다. 지난해 인재가 없어 뽑지 못한 대기업 미충원 인원수는 2만3317명(구인 인원의 6.7%)에 달했다. 일자리 '미스매치'가 심각하다는 거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변화를 꾀할 방법은 없을까. 재단법인 '교육의봄'은 역발상을 제안한다. 기업이 불필요한 스펙을 요구하지 않는 '스펙 다이어트'를 시작하면 사교육 문제부터 저출생 문제까지 해결하는 트리거가 될 수 있다는 거다. 더스쿠프가 교육의봄과 함께 '스펙 경쟁'의 꼬리를 끊어야 할 이유와 그 방법을 모색해 봤다. '스펙 쓸모없는 경제학' 1편이다.

■ 탈스펙 왜 안 되나 = 사실 기업들이 구직자에게 요구하는 건 천편일률적인 스펙이 아니다. 업무 성과를 낼 수 있는 직무 역량이나 조직 적합성이다. 그런데 왜 구직자들이 휴학을 해가며 월평균 44만원(잡코리아·2021년 기준)을 투자해 스펙을 쌓는 걸까. 이유는 간단하다. 여전히 많은 기업이 입사지원서에 스펙 기재를 요구하고 있어서다. 아이러니한 건 10년 전보다 스펙 요구가 더 심해졌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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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은 채용을 위한 필수 자격 요건에서 학위를 제외했다.[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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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봄이 150개 기업의 입사지원서를 분석해 2014년 대통령직속청년위원회의 조사(100대 기업 입사지원서 분석) 결과와 비교했다. 그 결과, '출신학교' 기재를 요구한 기업의 비중은 2014년 93.7%에서 올해 99.3%로 5.6%포인트 증가했다. '학점'을 요구한 기업의 비중도 같은 기간 11.9%포인트(81.1%→93.0%) 늘어났다.

이뿐만이 아니다. '외국어 능력' 7.5%포인트(90.5%→98.0%), '자격증' 6.4%포인트(91.6%→98.0%) '공모전 수상경력' 36.0%포인트(34.7%→70.7%), '사회봉사' 55.4%포인트(12.6%→68.0%)의 추세도 비슷했다. 기업들이 창의력·문제해결 능력·소통 능력·리더십 등 복합적인 자질을 갖춘 인재를 원하면서도 채용 방식은 바꾸지 않고 있다는 거다.

물론 모든 스펙이 불필요하다는 건 아니다. 기업이 실제 채용 평가에 반영하지 않거나 직무 연관성이 낮은 스펙은 기재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스펙 경쟁의 고리를 끊는 출발점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기업들이 불필요한 스펙의 '칸'을 방치하는 이유는 뭘까. 수없이 밀려든 지원자들을 스펙이란 정량적인 기준으로 손쉽게 걸러내기 위해서다. "그동안 이렇게 해왔으니까" "그저 참고하기 위해서" 식의 관행도 원인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효율적인지는 짚어봐야 한다. 전선희 교육의봄 연구팀장은 "구직자는 시간과 비용을 들여 불필요한 스펙을 쌓느라 정작 기업이 필요로 하는 핵심 역량을 쌓기는 어렵다"면서 말을 이었다.

"기업으로서도 역량 있는 인재가 부족한 상황을 겪고 있다. 이런 비효율적인 경쟁을 막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스펙만 요구하고, 관련 자격증을 기재할 수 있는 개수를 제한하는 등의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 스펙과 성과 상관관계 = 원하는 인재를 찾지 못하는데도 기업은 왜 스펙을 고집하는 걸까. 여기엔 '학벌'이란 무시무시한 그림자가 깔려 있다. "학벌이 좋으면 일도 잘할 것"이란 일종의 고정관념이 아직도 채용문화의 밑단에 깔려 있다는 거다.

이 때문에 스펙과 업무 성과 간 상관관계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교육의봄은 지난 2022년 '학벌·스펙과 업무 성과의 관계 심포지엄'에서 반준석 LG마그나 인사팀 책임연구원이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A 제조사의 연구인력 792명을 대상으로 학벌·학점·영어성적과 업무 성과 간 상관관계를 5년간(2006~2010년) 추적 조사한 결과, 학벌이 미치는 영향은 미미한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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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직장을 목표로 한 스펙 쌓기 경쟁은 초‧중‧고교 시절부터 시작한다.[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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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연구원들의 출신학교를 수능배치표에 따라 '1군(상위 5개 대학)' '2군(6~20위 대학)' '3군(21~100위 대학)'으로 나눠 분석했다. 입사 후 1년부터 4년까지는 1군에 속한 연구원들의 성과가 2·3군 대비 높았지만, 의미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입사 1년차 1군 연구원들의 성과점수는 2.65점으로 2군(2.62점), 3군(2.53점)과 큰 차이가 없었다. 입사 5년째 성과점수는 되레 역전됐다. 1군 연구원 성과점수는 3.81점으로 2군·3군(각 3.88점)에 미치지 못했다.

학벌뿐만 아니라 학점과 영어성적을 분석한 결과도 유사했다. 다년간 고성과자들을 대상으로 스펙과 성과 간 상관관계를 분석해 유의미한 연관성이 없다는 것을 밝혀낸 구글과 애플의 사례가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란 거다.

김익성 동덕여대(뉴에듀케이션칼리지 원장)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동안 학벌은 '성실성의 지표'로 여겨져 왔고 일정 부분 유의미했다. 하지만 지금은 융복합적 인재를 요구하는 시대로 그 역량은 단기간에 길러지지 않는다. 기업의 채용 단계에서부터 교육 시스템의 변화로까지 이어져야 한다."

■ 어떻게➊ 명확한 채용 공고 = 결국 기업이 먼저 달라져야 한다는 건데, 중요한 건 '어떻게'다. 많은 기업이 도입한 '블라인드 채용'이 상책일까. 아니다. 블라인드 채용은 또 다른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구직자들이 어떤 스펙이 중요한지 몰라 모든 스펙을 쌓으려 하는 또 다른 늪에 빠질 수 있어서다.

그래서 기업이 어떤 인재를 원하는지, 무엇을 평가할 것인지를 먼저 명확히 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선희 연구팀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기업 스스로가 '기업'과 '직무'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 기업에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인재가 누구인지 구체적인 '상象'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또 이를 채용공고 단계에서 명확히 전달해야 구직자도 그에 맞는 준비를 할 수 있다." 명확한 '직무기술서'를 바탕으로 한 채용을 해야 한다는 거다.

이런 시스템을 가장 잘 도입한 곳 중 하나가 구글이다. 학위를 필수제출 서류에서 제외한 구글은 구글커리어 사이트를 통해 채용 공고 단계부터 직무별 필요한 경력·직무 역량·선호 자격·구체적인 업무 내용 등을 상세하게 공개하고 있다. 구직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자신에게 맞는 직무를 선택하고 준비할 수 있다.

채용 과정에서도 지원자를 다층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인지능력' '리더십' '조직문화 적합성(googliness)' '직무 관련 지식' 등을 평가하기 위해 지원자와 3~4차례 걸쳐 심층 면접을 진행한다. 물론 국내 기업들도 공채 대신 직무별 수시 채용을 진행하며 변화를 꾀하고 있지만 갈 길은 아직 멀다.

■ 어떻게➋ 투자 = 이처럼 채용 방식을 전환하려면 적절한 투자와 경영진의 의지가 필요하다. 채용 담당자들은 직무 역량 중심으로 전환하고 싶어도 의사결정 단계에서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숱해서다.

실제로 경영진의 의지로 채용 방식을 바꾼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글로벌 K-뷰티 기업 고운세상코스메틱이 대표적이다. 이 회사는 2022년부터 채용과정에서 학교‧학력‧영어성적‧자격증 등 직무와 무관한 스펙을 확인하지 않고 있다. 역량검사와 면접전형만 진행하는 '탈스펙' 채용으로 선발한 이들의 성과는 기대치를 웃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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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연 인재영입팀 팀장은 "달라진 채용 방식으로 뽑은 1기‧2기 인원의 수습평가(입사 3개월 기준) 점수는 각각 평균 89점, 84점으로 수습 통과 기준(70점)을 훨씬 상회했다"고 설명했다.

김익성 교수는 "그동안 공채 중심으로 채용을 해온 국내 기업들은 스펙을 보고 뽑은 뒤 원하는 인재로 키우겠다는 인식이 강했다"면서 "하지만 어떤 인재를 뽑아야 할지 채용 단계에서부터 확실히 한다면 구직자와 기업 모두 불필요한 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선희 연구팀장도 이렇게 지적했다. "대학 입시나 영어 능력 시험과 같은 점수를 따기 위한 수동적인 준비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활동을 통해 주도성을 키우고, 타인과 협업하고 소통하는 능력을 배워야 한다."

4차산업 시대가 원하는 문제해결력을 갖춘 인재를 키워내지 못하면 한국의 국가경쟁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아직도 '스펙의 늪'에 빠져 있는 한국 사회는 변화를 맞이할 준비가 됐을까.

이지원 더스쿠프 기자

jwle11@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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