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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9 (목)

"치매 아내, 시설 보내라? 죽기보다 싫어"…86세 남편의 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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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실종리포트(상)-다섯 가족 이야기(종합-②)

[편집자주] 머니투데이 사회부 사건팀은 지난 4개월간 전국 각지에서 실종 가족들을 만났다. '2024 실종리포트-다섯가족 이야기'는 한 공동체에서 함께 살아가는 실종 가족들에 대한 기록이자 오늘날 가족의 의미를 찾으려는 우리의 이야기다.



"친정가야" 또 사라진 알츠하이머 아내…86세 남편은 숱하게 뛰었다

③상습 실종 알츠하이머 아내, 남편 김화선씨 1987년 평생 지켜주자 약속한 부부, 아내 알츠하이머 진단에도 남편 "시설 못 보내" 팔순 넘어 아내 위해 요양보호사 취득 "나한테 와서 고생, 어떻게 그런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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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여 없어질까 손을 A씨 꼭 잡고 다닌다는 김씨의 뒷모습. 김씨가 손을 내밀자 A씨도 익숙한 듯 손을 잡았다. / 사진=최지은 기자, 그래픽=임종철 디자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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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니 옆이 허전했다. 아내가 없었다.

김화선씨(86)는 신발을 구겨 신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꽃샘추위는 옷깃을 여며야 할 만큼 차가웠지만 떨고 있을 아내를 생각하니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방배동 전체를 이 잡듯 뒤졌다. 함께 다니던 등산로부터 사람이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곳은 전부 다 살폈다.

"OOO 어딨어!" 답답한 마음에 이름을 소리쳐 보고, 주변 상인들에게 아내 인상착의를 설명하며 근처를 지나간 적 없는지 묻고 또 물었다. '금방 찾겠지' 스스로를 안심시켰지만 가슴은 더 뛰었다.

2시간 후인 오전 9시, 김씨는 인근 파출소·지구대에 신고하고 CCTV(폐쇄회로TV)를 봤다. 화면 속 A씨는 자정쯤 집을 나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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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 이후 걱정되는 마음에 자식들이 설치해준 위치 공유 어플리케이션. / 사진=최지은 기자, 그래픽=임종철 디자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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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에 신고한 후에도 김씨는 계속해서 A씨를 찾았다. 한밤 중에 탈진하지 않았을까, 제멋대로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팔순이 넘은 김씨는 그렇게 몇시간을 뛰어다녔다. 마음을 따라오지 못하는 두 다리가 야속했다.

1시간쯤 지났을까, 송파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아내를 찾았다고 했다. 자정에 방배동 집을 나간 A씨는 11시간 뒤 송파구 잠실역에서 발견됐다.

김씨는 한달음에 잠실역으로 달려갔다. 잠실역 1번 출구에 이르자 저 멀리 A씨가 보였다. "여보, 어떻게 여기까지 걸어왔어" 김씨 말에 A씨는 천진난만한 웃음을 보였다. 간밤의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이야기하자 "내가 원래 처녀 때부터 걸음이 빨랐어"라며 미소지을 뿐이었다.

◇1987년 평생 지켜주자 약속한 부부…알츠하이머 진단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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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때 엄청 놀라서 저쪽까지 다 찾아봤었어"라는 김화선씨의 말에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A씨. / 사진=최지은 기자, 그래픽=임종철 디자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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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봄, 둘은 처음 만났다. 잘 아는 지인이 '믿을만한 사람들이니 한번 잘 살아보라'며 이어줬다. A씨는 처음에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다. 김씨는 올라간 입꼬리를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좋았다. 언뜻 보이던 아내의 눈빛은 순수하고 맑았다. 두 사람은 평생 서로의 옆을 지키자고 약속했다.

33년이 지난 2020년 어느날, 김씨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A씨가 물건을 어디에 뒀는지 잊는 일이 잦아졌다. 방금 했던 이야기도 종종 기억하지 못했다. 병원에 간 A씨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A씨 실종도 올해 3월이 처음은 아니다. 일곱번도 더 애를 태웠다. 평소에도 한 눈을 팔면 A씨는 사라진다.

A씨는 기자에게 연신 친정집에 가야 한다고 했다. 방배2동에 계신 친정아버지·어머니를 봐야 한다며 동네에 친구가 많다고 했다. A씨 고향은 전남 목포다. A씨 부모님은 30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러면서 김씨를 '아빠'라고 불렀다. "우리 친정 아버지가 나를 정말 아껴요. 다른 남자 형제들한테는 매를 댔어도 나한테는 한 번도 매를 댄 적이 없다니깐요. 나를 정말 좋아하시나 봐." 김씨는 쓴웃음을 지었다.

김씨는 "손을 잡고 다니니 아버지 생각이 나는 것 같다. 가족이 그리운지"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도 "그래도 내가 자기를 좋아해 주는 것은 알고 있네"라며 웃었다.

◇팔순 남편의 다짐 "내 아내를 시설에? 죽기보다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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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하면서도 A씨는 남편 김화선씨 옆에 붙어있다. 김화선씨도 아내가 걱정되는지 인터뷰 도중에 힐끗 고개를 돌아보곤 했다. / 사진=최지은 기자, 그래픽=임종철 디자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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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추억은 노부부의 힘이다. "우리 아내가 요리 실력이 진짜 좋았어요. 일요일에 교회 사람들을 다 우리집으로 초대해서 아내가 한 요리를 같이 먹곤 했어요. 직접 담근 젓갈이랑 갈비찜이 기가 막혔어요. 사람들이 사서 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했어요." 갑자기 아내 칭찬을 하던 김씨가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김씨는 또 "예전에 아내랑 같이 금강산에 갔던 게 제일 기억에 남는다"며 "아내랑 같이 멋진 풍경을 보고 맛있는 것 먹으면서 등산하니까 참 좋았다"며 했다.

그런 그에게 주변에서 노인복지시설을 권유한다고 한다. "아내를 시설에 보내기는 죽어도 싫어요." 김씨는 이렇게 잘라 말했다. A씨 얼굴에 수줍은 웃음꽃이 피었다.

"젊었을 때 나한테 와서 고생했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을 시설로 보내나요. 시설에 들어가면 보고 싶을 때 못 보고 기력도 빨리 쇠한다고 하더라고요. 욕심일지 몰라도 남의 손에 맡기고 싶지는 않아요."

김씨는 최근 요양보호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여든여섯의 나이에 학원을 등록하고 매일 공부했다. 아내를 위한 선택이었다.

◇경찰에 연락, 112 실종 배지도…"기운 다할 때까지 아내 지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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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달려있는 방배서 정우재 경장이 고안해 낸 치매노인 뱃지. 경찰들은 이 뱃지를 보면 A씨를 알아보고 보호할 수 있다. / 사진=최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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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경찰들도 A씨를 '안다'. 서울 방배경찰서 실종팀 정우재 경장은 수차례 A씨를 찾아냈다. 지난 겨울에는 영하의 날씨에 사당역 부근 공영주차장에서 A씨를 찾았다. 마지막으로 CCTV에 찍힌 곳을 중심으로 수색 반경을 넓힌 끝에 주차장에 우두커니 있는 A씨를 발견했다.

정 경장은 "우리 할머니들 복장이 다들 비슷하다"며 "겨울에 패딩을 입고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나가시면 CCTV를 다 찾아봐도 (실종 어르신들을)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고심 끝에 정 경장은 경찰들만 알아보는 배지를 A씨에 부착하는 방안을 추천했다. 해당 배지를 단 어르신이 혼자 방황하는 모습을 경찰들이 보면 신고가 없더라도 선제적으로 조치하라는 취지다.

정 경장은 "함부로 배지를 달 수 없다. 치매 어르신 분들이 치매라는 것을 알리기 싫어하시기 때문"이라며 "가장 좋은 방법은 시민들 제보와 신고"라고 당부했다.

김 씨는 "아내가 젊을 때 땅을 보고 다니던 습관이 있었다. 내가 그 때 아내한테 간판을 보면서 길 좀 외우라고 했더라면 치매가 늦게 오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도 된다"면서 "기운이 다할 때까지는 아내를 지킬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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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윤선정 디자인 기자




같은 서울 살았는데…생이별 남매가 다시 만나는데 걸린 시간 61년

④오빠 종석씨(70)·동생 종순씨(68) 1962년 뿔뿔이 흩어졌던 남매, 3년간 서울경찰청 실종 수사 끝에 상봉 "살아있어줘서 고맙다" 한참을 울었던 그들…추석 앞두고 아직 못찾은 막내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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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8일 서울 마포구 대흥동 정종순씨 자택에서 종순씨. /사진=최지은 기자, 그래픽=임종철 디자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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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어머니는 종석이 아버지한테 자녀가 없는 줄 알고 재혼했다. 얼마 후 사별한 전처가 낳은 종석이와 동생 종순, 종자가 서울로 아버지를 찾아왔다. 하루 아침에 자식 셋이 생긴 새어머니는 "보따리 싸서 나가겠다"고 했다.

종석이는 가족들이 함께 있는 단칸방이 싫어 자주 집을 비웠다. 어느날 집에 돌아와 보니 두 동생이 없었다.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61년이 흘렀다.

◇1962년, 먹고 살기 바빴던 그 때 그 시절…세남매는 그렇게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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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8일 서울 마포구 대흥동 정종순씨 자택에서 종순씨. /사진=최지은 기자, 그래픽=임종철 디자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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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석은 1954년 충북 중원군 상모면 화천리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집안은 지역 유지였다. 그 당시 아버지는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 집에 있는 5단 짜리 '단스'(옷장을 뜻하는 일본어)를 열면 지폐가 가득했다.

종석이가 5살 때 가족은 충북에서 서울 성동구 사근동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 때쯤 어머니에게 병이 생겼다. 병명도 몰랐다. 어머니는 "죽더라도 고향에서 죽고 싶다"며 종석이와 동생 둘을 데리고 충북 중원군 상모면 고향 마을로 내려왔다.

"엄마가 뒤에서 갈게 종순이 먼저 가."

종석의 둘째 동생 종순(1956년생)은 시골길을 걸으면서도 자꾸 뒤쳐지는 엄마가 신경쓰였다. 이모네 간다고만 들었다. 막내 동생 종자(1959년생)는 엄마품에 안겨 있다. 종순이 "왜 자꾸 뒤로 쳐져요?"라고 물을 때마다 어머니는 "먼저 가"라고만 했다. 종순이가 이모집에 도착했을 땐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종순은 이모집에서 지냈다. 이모집에는 버스 차장으로 일하던 '춘분이 언니'가 살았다. 얼마 후 춘분이 언니와 사람들이 종순에게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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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석씨와 종순씨 남매의 아버지인 고 정재옥씨 제적등본. /사진=최지은 기자, 그래픽=임종철 디자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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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남매는 상모면 일대 당숙모집, 이모집 등에 한명씩 맡겨졌다. 1년쯤 후 어떤 친척이 서울에 사는 아버지를 찾았다며 흩어졌던 삼남매를 데리고 용산구 보광동 단칸방으로 향했다. 가세는 기울어져 있었다.

서울에 오니 아버지는 새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아버지한테 자식이 없는 줄 알았던 새어머니는 삼남매가 아버지를 찾아오자 마음이 편할리 없었다. 어느날 종석이가 단칸방으로 돌아왔을 때 두 동생은 없었다.

종석 동생 종순이는 6~7살때쯤 이모가 자신을 장충동 한 부잣집에 식모로 맡겼다고 어렴풋이 기억한다. 종석은 종순이를 찾아간 적이 있다. 까치발을 하니 담장 넘어 종순이가 보였다. 종순은 오빠를 알아봤다. "오빠 배고프지"라며 누룽지를 가져다줬다.

종순이는 '아기옷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부잣집을 나왔다. 그렇게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한 아동양육시설에 입소했다. 종순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61년 후…어느날 걸려 온 전화 "서울경찰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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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찰청 실종수사팀 함명호 팀장(경감·오른쪽))과 전세희 수사관(경사)./사진=최지은 기자, 그래픽=임종철 디자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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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찾고 있는 분이 계세요. 아버지와 오빠 성함 기억하세요?"

오빠와 헤어진 지 60여년 후. 2023년 7월 어느날 종순씨는 경찰 전화를 받았다. 서울경찰청 실종수사팀이라고 했다. 처음엔 보이스피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와 오빠의 이름이 머릿속을 스쳤다.

종순씨는 오빠 이름을 종식이라고 잘못 답했다. 경찰관이 "종석씨 아닌지"라고 다시 묻자 그제야 "그런 것 같다"고 답했다. 오빠가 찾고 있다며 만나고 싶은지 물었다. 몸이 떨리고 눈물이 흘렀다. 전화를 끊은 종순씨는 꼬박 밤을 샜다.

종석씨가 2020년 11월 경찰에 실종 사건을 접수하면서 시작된 수사가 3년만에 결실을 맺었다. 서울청 실종수사팀 소속 함명호 팀장과 전세희 경사는 자기 일처럼 수사했다. 먹고 살기 바빴던 우리의 60년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가족들 중 일부라도 꼭 찾아주고 싶었다.

어머니와 이모의 호적을 확인하려고 했지만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 서울기록원 협조를 받아 사라진 아동보호시설의 입소자 기록을 며칠간 모두 들여다봤다. 종순씨의 송죽원 입소기록을 찾아냈고 오빠와 동생의 DNA를 검사해 모계가 일치한다는 결과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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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8일 서울 마포구 대흥동 정종순씨 자택에서 종순씨. /사진=최지은 기자, 그래픽=임종철 디자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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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종순씨도 61년간 오빠와 가족을 잊은 적이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움은 짙어졌다. 연인이 생길 때면 유독 그랬다. 결혼 이야기가 오가면 종순은 불안해졌다. 자신의 사연을 들으면 상대 가족이 반대할 수 있다는 걱정이 있었다.

1980년대초 경찰청을 찾아가 가족들을 찾아달라고 했다. 1983년부터 진행된 '이산가족찾기 특별생방송'을 보고 방송국도 찾아갔지만 '전쟁 고아가 아니라 안 된다'는 답을 들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손자까지 봤지만 마음 한켠엔 늘 오빠와 여동생이 있었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가족 생각이 깊어지는 데 찾고 싶어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더라도… 꼭 다시 만나서 같이 살고 싶었습니다"

종순씨는 눈시울을 붉혔다.

◇"살아있어줘서 고맙다"…종석씨와 종순씨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지난해 8월 정종석씨는 경찰의 도움으로 61년만에 동생 종순씨와 상봉했다. / 영상=정종순씨 제공

61년만이었다. 지난해 8월 종석씨와 종순씨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오빠는 매제를, 동생은 올케를 처음 만났다. 동생은 손주도 있었다. 종석씨는 "살아있어줘서 고맙다"며 눈물을 터트렸다. 눈물을 삼켰던 60여년의 세월이 떠올랐다.

동생은 마포구에 산다고 했다. 종석씨 집은 강서구다. 버스 한번 타면 되는 거리인데 다시 보는 데 61년이 걸렸다. 종순씨는 눈물을 훔치며 "버스나 지하철에서 마주쳤을라나"라며 미소 지었다. 상봉 후 이들 남매는 일주일에 한 두번은 꼭 서로를 찾는다.

성인이 된 종순씨는 올해 오빠와 두번째 추석을 지낸다. 명절이면 오빠 가족과 한곳에 모여 밥을 먹고 사는 이야기를 한다.

그러다 문득 막내 종자씨 생각을 한다. 아직 찾지 못한 막내 동생과 추석을 함께 보내는 상상을 한다. 종석씨는 "막내가 살아 있을지 모르겠다"며 "살아 있으면 꼭 한 한번 보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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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순씨가 동생 종자씨의 제적등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제적등본에 따르면 정종자씨는 1959년 충북 증원군 상모면 화천리 352번지에서 태어났다. /사진=최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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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석진 기자 5stone@mt.co.kr 정세진 기자 seji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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