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9.20 (금)

[책&생각] “내래 물러날 곳이 없다”던 이중섭의 ‘통영 연화’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소설가 김탁환(55)의 새 장편 주인공인 통영 시절의 이중섭. 김 작가는 19일 한겨레에 “평안남도 사투리를 전형적으로 구사하는 인물로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유가 뭘까. 사진은 이중섭이 통영 녹음다방(호심다방의 전신)에서 유강열·장윤성·전혁림과 함께 ‘서양화 4인전’을 열었을 때 모습. 남해의봄날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참 좋았더라

이중섭의 화양연화

김탁환 지음 l 남해의봄날 l 1만9500원

“사각의 링에선 복서래 달아날 곳이 없구, 사각의 원고지에선 문인이래 숨을 곳이 없구, 사각의 도화지에선 화가래 물러날 곳이 없다.” 말 적던 이가 박수까지 쳐대며 구변을 부린다. “시인을 견자(見者) 즉 보는 사람이라 하디. 무슨것을 봔? 평범한 사람은 아니 보는 걸 본다 이거이야. 기렇게 본 걸, 글로 바꾸문 시인이구 그림으로 바꾸문 화가! 시인은 글 짓는 화가구, 화가는 그림 그리는 시인이다 이 말입네….”

“감각이래 논리를 동반한다”기까지, 일장연설을 쏟는 이는 다름 아닌 화가 이중섭(1916~1956)이다. 눌변으로 더 알려진 비운의 화가, 그러다 죽어서야 이르길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그런 중섭이 살아 평안도 말투로 거침없이 자신의 예술관과 내면을 사자후하고 있으니, 역사소설로 정평이 난 김탁환의 새 장편 ‘참 좋았더라’에서의 면모다.

소설은 이중섭에 관한 숱한 산문과 논고로부터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그중에서도 창작의 영역 안에서 생생히 복원해내는 중섭의 ‘말투’로 도드라진다. 환란기 ‘고촉’ 앞 중섭이 중섭의 말로 들려 잡힐 듯하다.

중섭은 1916년 평안남도 평원 출생이다. 김소월·백석 등이 앞서 수학한 오산고보(평안북도 정주)를 졸업했다. 그의 스승이 “밑그림을 바닷가 모래알보다 더 많이 하여라. 그런 다음에 네 예술이 있다”고 가르친 임용련(1901~?)이다. 1932년 형 중석의 백화점 사업으로 원산(함경남도)에 가족 모두 이주 정착, 남부러울 것 없는 후원 아래 1943년 도쿄 유학까지 마쳤다. 사랑하는 여인(야마모토 마사코 또는 이남덕, 1921~2012)과 결혼해 아틀리에를 갖추고 금강산 오가며 창작하던 7년이 원산서 펼쳐지지만, 이 같은 시기는 전후 다시 오지 않는다. 자신의 처지도, 말의 처지도 송두리째 전복된 탓이다. 1950년 12월 부산으로 월남한 뒤 서귀포, 다시 부산, 통영, 진주, 서울, 대구를 거쳐 종국 1956년 9월6일 불혹의 나이로 서울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홀로 병사하기까지 중섭은 가난했고, 그의 말은 쓸쓸했다.

이중섭 생애는 사후 풍요로워진다. 평전만 3종이다. 2016년 6월 사후 최초 열린 대규모 회고전 제목은 ‘이중섭, 백년의 신화’였다. 남은 틈이라면 육성이고 영상일 터, 중섭의 말의 부활이 지닌 매력이고 그의 말이 가장 잘 되살아날 곳, 바로 통영으로 독자가 안내되는 이유겠다. 이제 소설이다.

성격이기도 하겠으나 월남 뒤 이방인으로서 평안도 방언을 쓰는 중섭은 위축된다. 게다 1952년 6월, 서귀포·부산 생활을 끝으로 아내는 두 아들을 데리고 도일한다. 극심한 생활고에 아내가 부친상마저 당한다. 이후 중섭이 가족을 만난 건 이듬해 여름 도쿄에서의 1주일이 전부다. 소설이 가족과 이별 뒤 홀로 선상에서 울며 게우는 무력한 중섭으로 여는바, 옹근 중섭이 처한 세계가 그러하다. 사흘 항해의 끄트머리, 중섭은 여전히 웅크려 있다. 다만 옴츠리어, 은지화를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중섭이 통영에 머문 시기는 1953년 11월부터 1954년 6월이다. 함경남도 북청 출신 공예가 유강열(1920~1976) 덕분이다. 도쿄 유학파로 원산에서 중섭에게 신세 지고 깊이 교우했다. 별명이 ‘덤베’(‘덤벼든다’ 뜻)일 만큼 진취적이다. 유강렬은 일찌감치 통영에 터 잡고 나전칠기기술원 양성소(소장 김봉룡)를 차렸다. 가르치길 꺼리는 중섭에게 강사직을 맡기고, 아틀리에와 화구를 제공해 창작에 몰두하도록 돕는 장본인이다.

중섭의 말은 시(詩)도 살린다. 중섭의 시에 대한 이해나 탐독은 낯선 사실이 아니다. 외던 시가 많아 “누이 허난설헌의 시를 앉은 자리에서 술술 다 외웠다는 허균의 환생이란 놀림까지 당”하곤 했다. 나아가 작중의 시는 중섭의 처지이자 의식의 흐름이요, 예술적 양식으로 발현한다. 그가 프랑스어도 공부하며 동경한 파리의 랭보, 폴 발레리, 개별적으로 가까운 구상, 양명문, 통영에서 걸목이 되어준 유치환, 김춘수 등은 실체와 허구의 경계를 허물며 중섭을 입체화한다. 시공을 초월한 시의 감각과 시공간이 고증된 일화로서 말이다. 바야흐로 중섭은 중섭의 그림으로 육박해 간다.

소설에선 중섭이 분주히 나다닌 통영의 지리적 부검뿐만 아니라, 주요 작품과 착상에 관한 심리적 부검이 감행된다. 대작에 대한 야망, 실패에 대한 공포로 짓눌릴 때 연필을 깎고, 연필을 깎으며 시를 왼다. 그러자니 까마귀, 보름달이 떠오르고, 물고기와 아이들이 다녀간다. “조금만 힘을 줘도 죽음에 너무 가깝게 들러붙었”던 까마귀에 “삶을 향해 날아오르는 기운을 담아내고 싶”다. “살아남고자 몸부림치는 존재”여야 한다. 물고기와 벌거숭이 아이들은 서로가 자유여야 한다. “물고기와 노는 법을 아는 아이들이고 오래 놀아 본 아이들” “물고기에게 바다 소식을 들은 아이들이고 물고기에게 항구의 일을 들려준 아이들” 그렇게 서로가 “기쁨은 보태고 비밀은 나눈다.”

한겨레

화가 이중섭의 작품 ‘물고기와 아이’. 남해의봄날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화가 이중섭의 작품 ‘들소’. 작가가 통영에서 그린 첫 소다. 남해의봄날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한겨레

화가 이중섭의 통영 시절(1953년 11월~1954년 6월) 사진이다. 맨 왼쪽. 가운데가 공예가 유강열(920~1976)이다. 남해의봄날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통영에서 완성된 작품만 100점이 넘는다. 그중 중섭의 심리, 예술적 지향, 하물며 가족을 위해 돈 벌어야 한다는 현실 과제조차 아우르는 건 무엇보다 ‘소’다. 오산고보 때 미술전 출품작도 이 땅의 황소 아니었던가. 작품 ‘들소’(통영서 그린 첫 소) 이후 ‘싸우는 소’ ‘붉은 소’ 등 숱한 ‘소’가 통영에서 탄생하고, 마침내 서울에서의 ‘흰 소’로 이어진다. 소설대로라면 “오롯이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한 곳이 바로 통영이다. 특히 가상의 제자 남대일을 상대하여 가르치는 형상은, 중섭이 중섭을 가르치고 말하고, 다그치고 북돋워 중섭을 성취해가는 도정처럼 보인다.

1953년 12월 통영 성림다방에서 소규모 개인전을 열고, 1955년 1월 서울 미도파백화점에서 그토록 고대하던 개인전을 연다. 소설은 여기까지다. 석달 뒤인 4월 대구에서의 개인전 뒤 중섭은 돌연 정신질환(자학·거식증)으로 입원한다. 이듬해 화공은 가난을 벗어나지도, 가족을 만나지도 못한 채 죽는다. 책 ‘그림, 그 사람’의 김동화(정신과 의사)는 중섭의 질환을 “(사랑하는) 대상 상실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남다른 취약성”에서 연유했다고 짚는다. 표면에 아내와 가족, 이면엔 어머니가 있으며, 그것이 “물러날 곳 없”던 도화지에서 닭으로, 황소로 표상된 격이다.

그렇다면 통영도 결국 “무섭고 괴롭고 위태로운 겨울밤”이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그 반년여가 화가에게 전후 단 한 철 “화양연화”였을 것에 내년 30주년을 맞는 작가 김탁환은 3년(조사·집필)을 걸었다. 통영에서 13년 전 문 연 출판사 남해의봄날이 ‘통영 시절의 이중섭’을 알고선 놀라 5년 전 의뢰해 이제 나왔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언론, 한겨레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행운을 높이는 오늘의 운세, 타로, 메뉴 추천 [확인하기]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