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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2 (일)

잎도 뿌리도 없지만…꽃 피워내며 생태계 다양성 한몫 [E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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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충남 태안군 천리포수목원 입구정원에 피어있는 기생식물 ‘야고’. 천리포수목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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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 등 볏과 식물 뿌리에 기생
8~9월 자주빛 곰방대 모양 꽃
탐방객 관심끄는 독특한 생존



올해 초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한 아나운서의 인터뷰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첫 출근을 앞두고 1인분의 몫을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사연에 해당 아나운서는 “왜 1인분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0.2의 인간일 수도 있거든요. 그리고 1.8을 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거든요”라고 답했다. 물론 말 그대로 ‘0.2인분만 해도 상관없다’는 의미는 아니었고, ‘나의 그릇을 이해하는 동시에 남들만큼 1인분을 못 한다고 해서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취지였다.



굳이 나쁘게 표현하자면 사회에서는 0.2를 하는 사람들을 두고 ‘기생한다’고도 한다. ‘기생’의 사전적 의미는 ‘스스로 생활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의지하여 생활함’이다. 그렇다면 혼자서는 살지 못하고 숙주식물로부터 이익을 얻는 기생식물은 어떨까? 기생식물 역시 전체 생태계의 관점에서는 ‘1인분을 하지 못하는 식물’로 볼 수 있을까? 오늘 다룰 식물은 8월 말부터 수목원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기생식물, ‘야고’의 이야기다.







제주도, 서울 하늘공원에서도 서식





야고(Aeginetia indica L.)라는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현삼목 열당과에 속하는 한해살이 식물 야고는 억새나 띠와 같은 볏과 식물의 뿌리에 기생한다. 뿌리나 잎이 없는 대신 숙주식물의 관다발에 침투해 영양분과 수분을 얻는 흡기(기생식물이 숙주로부터 양분을 빨아들이는 기관)를 가졌다. 8월 말 볏과 식물의 무성한 잎을 들춰보면 옹기종기 모여있는 야고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기생식물은 광합성을 하지 않고 모든 영양분을 숙주식물로부터 빨아들이는 ‘전기생식물’과, 일부 광합성을 하면서 숙주식물에 기생하는 ‘반기생식물’로 나뉜다. 흡기가 숙주 식물에 붙는 위치에 따라 특징을 구분하기도 한다. 숙주식물의 줄기에 흡기를 붙이고 사는 기생식물은 ‘줄기기생식물’로, 흡기가 뿌리에 붙으면 ‘뿌리기생식물’로 구분한다. 광합성을 전혀 하지 않는 야고는 전기생식물이자, 억새의 뿌리에 붙어 영양분을 얻는 뿌리기생식물로 분류된다.



기생식물은 대부분 숙주식물의 생애주기를 따라간다. 10~20㎝ 크기의 야고 역시 억새가 한참 꽃 피우는 8~9월 억새의 뿌리에서 영양분을 얻으며 꽃을 피운다. 한 줄기당 하나씩 달리는 종 모양의 꽃은 3~5㎝ 크기로, 연한 자주색을 띤다. 옆으로 구부러진 꽃의 모양과 줄기가 마치 구부러진 곰방대처럼 생겨 ‘담뱃대더부살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야고는 어둡고 습한 곳을 좋아하는데, 줄기와 잎이 빽빽하고 높게 자라는 덕에 자연스럽게 어둡고 습한 환경이 만들어지는 억새 아래는 딱 알맞은 환경인 셈이다.



큰 억새 밑에 옹기종기 숨어서 피는 독특한 생김새 덕분에 외국에서는 ‘숲의 유령 꽃’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힌두교에서는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인도와 네팔에서 개최되는 힌두교 축제인 티즈 축제에서 야고는 강력한 신인 시바신과 히말라야의 딸이자 시바신의 아내 파르바티의 상징물로서 신전 주변에 장식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전남 여수 등 남부 해안가나 제주도 억새밭에서 자생하는데, 서울의 난지도 쓰레기매립장을 복원하며 생긴 하늘공원에서도 야고를 만나볼 수 있다. 제주도에서 수집한 억새를 하늘공원에 옮겨 심는 과정에서 야고의 씨앗이 함께 옮겨온 덕분이다.



수목의 건강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인 수목병리학에서는 기생식물에 의한 수목의 피해를 따로 구분해 방제법을 설명한다. 대표적으로 줄기에 흡기를 박고 살아가는 겨우살이나 새삼 등이 언급되는데, 대부분은 물리적으로 제거하거나 제초제를 사용하여 방제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기주 식물(기생식물의 숙주가 되는 식물)인 수목의 건강을 제1의 목적으로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실제 수목원 현장에서는 어떨까? 야고도 겨우살이나 새삼과 같은 대표적인 기생식물이지만, 굳이 야고를 없애기 위해 물리적으로 제거를 하거나 제초제를 살포하진 않는다. 야고가 조금 자란다고 해서 억새의 생육에 크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도 않고, 오히려 수목원 생태계를 구성하는 독특한 기생식물의 하나로 소개하기도 좋기 때문이다. 실제로 억새가 화려하게 꽃을 피우는 8월 말부터 숲 해설을 하는 가드너들은 일부러 억새 풀을 걷고 그 아래 돋아난 야고를 탐방객들에게 보여준다. 잎도 없고 뿌리도 없지만 나름의 생존 전략으로 작은 꽃을 피워내는 야고의 독특한 생애에 많은 탐방객이 귀를 기울이는데, 그 자체로 수목원에서 나름의 밥값은 하는 셈이다.







신규 군락지 발견되면 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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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는 연한 자주색을 띠는 꽃을 피우는데, 꽃의 모양과 줄기가 구부러진 곰방대처럼 생겨 ‘담뱃대더부살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천리포수목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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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참나무 가지를 말려 죽이는 겨우살이나, 목련 줄기를 휘감고 자라는 칡은 수목원에서도 골칫거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지에 흡기를 박고 자라는 겨우살이의 연노란색 열매는 한겨울 새들에게 충분한 먹이를 제공하고, 칡은 오래되고 쇠약한 나무의 죽음을 앞당겨 부생식물(생물의 사체나 배설물 등에 기생해 양분을 얻어 사는 식물)의 서식처를 만들어준다. 기주 식물을 괴롭히는 기생식물 역시 숲의 생물다양성을 풍부하게 만드는 생태계의 한 축을 담당한다. 기생식물인 야고도 한반도 도서 지역 생태계의 생물다양성을 확보하는 희귀식물이라는 점에서 신규 군락지가 발견되면 여전히 언론에 오르내리며 화제가 된다.



수목원에서는 일반적인 상식 또는 인간의 관점과는 조금 다른 기준을 따라가는 경우가 있다. 가지치기는 나무의 수형을 관리하기 위한 기본적인 원예 기술이지만, 수목원에서는 인위적인 가지치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덕분에 하늘이 아닌 땅을 향해 자라는 가지나, 탐방로 위를 가로질러 뻗는 가지 등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나무 본래의 수형을 감상할 수 있다. 산책로 동선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나무가 자라는 공간을 피해 길을 조성하기 때문에 길이 구불구불 나 있거나 지도로 확인하기 어려운 오솔길도 많다. 대부분의 기준이 사람이 아닌 식물이 우선인, 독특한 공간적 특성을 갖는 셈이다.



야고는 1만7천여 분류군에 달하는 천리포수목원의 식물 이력 관리 시스템에조차 그 이름을 남기지 못하는 몇 안 되는 식물이다. 그러나 존재 자체만으로도 수목원 생태계의 다양성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1인분 몫(?)을 하고 있다. “다양할수록 좋다. 나무도, 사람도. 수목원의 건강함과 역동성은 구성원들의 다양한 시각과 의견에서 나온다.” 식물이 우선인 천리포수목원의 문화와 동료상(像)에 이와 같이 다양성을 강조하는 문구가 들어가 있는 데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황금비 나무의사



한겨레 기자로, 콘텐츠 기업 홍보팀 직원으로 일했다. 말 없는 나무가 좋아서 나무의사 자격증을 땄고 정신을 차려보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 지는 천리포수목원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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