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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3 (월)

[횡설수설/조종엽]폐지 줍는 노인 다닐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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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폐지 줍는 노인이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가 끊이지 않는다. 추석 연휴 뒤인 20일 새벽에도 경기 고양시의 편도 3차로 도로에서 폐지 수거용 리어카를 끌던 60대 여성이 뒤따르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에 들이받혀 숨졌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면 ‘그러게 왜 인도를 놔두고 차도로 다니냐’며 혀를 차는 이들이 적지 않다. 리어카가 폐지나 고물을 실은 채 차도를 서행하면 ‘교통 흐름을 방해한다’며 경적을 울리거나 욕설을 하는 운전자도 없지 않다.

▷하지만 리어카를 끄는 노인 대부분은 인도로 가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갈 수가 없어서 차도로 다닌다. 도로교통법상 너비 1m가 넘는 손수레는 차(車)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폐지 수집 노인의 43%가 리어카를 쓰는데, 대개 폭이 1m를 넘는다. 보도(인도)와 차도가 구분된 도로에서 이런 리어카는 차도로 통행해야 한다. 인도로 가면 자동차가 인도를 주행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 차도가 따로 있는 도로에서 인도로 가다가 보행자를 치기라도 하면 12대 중과실 사고에 해당돼 형사 처벌을 받게 된다. 폐지 수집 중 교통사고 경험률(6.3%)이 전체 노인 보행자 교통사고 경험률(0.7%)보다 훨씬 높은 원인 중 하나다.

▷리어카로 폐지를 줍는 노인들은 상상만 해도 아찔한 위험을 감수한다. 리어카는 자전거와 마찬가지로 도로에서 맨 오른쪽 차로로 다니도록 돼 있다. 해당 차로를 불법 주차 차량이 점유한 경우엔 부득이하게 왼쪽 차로를 일부 침범하게 된다. 가로변에 버스전용차로가 있는 도로에선 전용차로 왼쪽이 지정 차로다. 이런 도로에선 왼쪽 차로의 일반 차량과 오른쪽 차로의 버스 사이를 곡예 하듯 다녀야 한다.

▷동네 주택가 이면도로만 다니면 되지 않겠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모르는 소리다. 지난해 말 정부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폐지를 주로 집 근처(4km 이내)에서 수거하는 노인은 전체의 43%였고, 나머지는 그보다 훨씬 먼 거리까지 이동하며 폐지를 수집했다. 전체의 47%는 상가·사무실 지역에서 폐지를 주웠고, 주거지역과 상가 등을 가리지 않고 전 지역에서 줍는 이들도 28%였다. 그렇게까지 다니면서 폐지를 주워도 손에 쥐는 돈은 하루 평균 6000원 남짓이었다.

▷일정 크기 이상의 손수레를 차로 분류하는 현행법은 소달구지와 마차가 자동차와 함께 도로를 달리던, 그래서 일반 도로의 통행 속도가 지금처럼 빠르지 않았던 과거 시대의 유산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제 도로에서 우마(牛馬)는 사라지고 폐지 줍는 노인만 덩그러니 남아 자동차에 치이는 위험을 감내하고 있다. 당장 노인 빈곤을 해소할 수 없고, 모두에게 폐지 수거보다 나은 다른 일자리를 제공하기 어렵다면 최소한 좀 더 안전하게 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조종엽 논설위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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