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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3 (월)

[DBR]인센티브 제도의 배신, 한국 산업 경쟁력에 큰 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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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한 만큼의 보상’ 신화 깨져

능력주의에서 좌절의 사회로

인센티브 정상 작동시키려면

AI로 성과 면밀히 검증해야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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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살기 위해 야근과 주말 근무를 마다하지 않던 한국인의 근무 태도는 전 세계에 ‘일 중독자(Workaholic)’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그 배경에는 ‘노력과 능력에 따라 보상이 따른다’는 인센티브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파이어족(경제적 자유를 얻어 일찍 은퇴하고자 하는 사람들), ‘조용한 사직’(직장을 다니면서도 최소한의 업무만 하며 사실상 퇴직 상태처럼 지냄)이 시대의 키워드가 된 지금, 근면 성실이 한국을 대표하는 말이 될 수 있을까.

선진국에 가까워질수록 소득에 대한 열망이 줄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경제 수준이 일정 궤도에 오르기 전에 너무 빨리 성장에 브레이크가 걸리게 되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특히 한국 경제를 성장시키고 선진국 반열에 오르게 만든 인센티브, 즉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 의지와 동기에 이상 신호가 울리고 있다.

조직 말단에 진입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면 최고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는 능력주의 패러다임은 왜 더 이상 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까? 인센티브 체계의 오작동 현상을 분석한 DBR(동아비즈니스리뷰) 2024년 9월 1호(400호) 기사를 요약해 소개한다.

● “신입사원 100명 중 임원 1명 못 나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많은 제3세계 국가와 달리 한국은 지배계층이 철저하게 파괴됐다. 모두가 평등한 빈곤선에서 시작한다는 ‘기회의 균등’은 전 국민에게 공정한 게임에 대한 신뢰를 제공했고, 누구든 노력한 만큼 보상을 거둘 수 있다는 약속은 강력한 인센티브로 작용했다.

또한 6·25전쟁 이후 베이비붐은 노동시장에 엄청난 공급 압력으로 작용했다. 이때 수출 지향의 제조업 육성 전략이 신의 한 수가 됐다. 밀려드는 노동력을 기업의 하부로 수용하고, 성과 평가에 따른 승진 경쟁으로 연결했다. 기존 기업이 성장하고 새로운 기업도 늘어나며 팽창하는 피라미드 구조가 형성됐다.

그러나 피라미드 구조에 잠복하던 상위 직급 부족이 문제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기업이 승진율을 낮추면서 직급 단계별 체류 연한도 점점 늦춰졌다. 체류 연한이 계속 늘어나자 동시에 입사한 국내 대기업 신입사원 100명 중 임원 한 명이 나오기도 힘들다는 분석도 제시됐다.

그나마 남은 자리도 외부 인재가 선호되면서 임원 승진은 이제 넘볼 수 없는 영역이 돼 간다. 이를 수준 높고 다양한 인력을 충원하기 위한 시스템의 다원화라고 볼 수 있지만, 축소되고 있던 상위 직급으로의 내부 이동은 더욱 위축됐으며 진입 불가의 ‘카스트’가 되고 있다.

● 좌절에 빠진 한국 사회

외부 인재에 대해선 더 엄중한 검증이 이뤄져야 하지만, 한국 기업에선 오히려 과거의 커리어가 능력과 성과의 검증을 우회하는 ‘프리패스’ 티켓으로 간주된다. ‘월드 클래스’라는 아우라를 입은 신흥 경력의 지배적 위상이 상당히 빠르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상향 이동이 불가능할 경우 사람들은 진입 장벽을 거부하며 개선을 요구하거나, 자신의 노력 부족으로 실패했다고 인정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경력의 상향 이동이 개인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에 심리적으로 승복하는 좌절의 양상이 나타난다. 공정한 게임에서 졌다는 패배의 인정은 전략의 수정과 재도전으로 이어지지만 좌절은 실망과 포기를 초래한다.

현재 국내 대기업에서 구글, 애플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 출신이라면 ‘묻지 마’ 채용이 이뤄진다는 내부의 볼멘소리도 들린다. 불평등에 민감한 한국 사회에서 의외의 현상으로 보이지만 새로운 경력 원천들이 갖는 존재감과 권위는 압도적이다. 기회의 불균등을 야기하는 새로운 경력 경로가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은 능력주의에 의해 정당화되는 것이다.

● 공정한 게임을 위한 혁신

최근의 역동적인 경영 환경에서는 학습 능력의 중요성이 점점 더 부각되고 있다. 기술 발전이 가속화되는 정보화 시대에 학습 능력으로 무장한 한국 기업은 그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경쟁력을 과시한다. 뒤늦게 진입한 자동차, 반도체, 이차전지 등 첨단 산업에서 글로벌 강자로 부상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이처럼 한국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학습하는 법을 학습한’ 인재, 안락 지대를 벗어나 도전하는 인재를 요구하지만, 인센티브 제도의 동요는 학습의 동기를 저해해 한국 산업의 경쟁력을 무너뜨리는 결정타가 될 수도 있다.

인센티브를 정상 작동시킬 실마리는 정보 비대칭 해소에 있다. 특정 경력이 카스트화되는 것은 능력과 성과에 대한 정보가 투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임 리더가 명문대를 나와 글로벌 빅테크에서 근무했기에 그를 신임하기보다는, 취임 이후 어떤 전략을 어떻게 실현했는가를 점검하고 평가해야 한다. 즉 ‘게임의 룰’이 공정한지 엄밀히 검증해야 한다.

다행히 인공지능(AI)을 통해 신흥 리더에 대한 엄격한 검증의 길이 열리고 있다. 인공지능이 리더가 추진하는 정책의 의도, 효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게 하는 것이 핵심 아이디어이다. 사례가 쌓여 갈수록 인공지능이 학습하고 진화하기 때문에 그 정확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최근 축구협회를 둘러싼 논란에서 축구 팬들은 경질당한 클린스만 감독과 그 전임자인 벤투 감독을 엄밀하게 비교하며 평가했다. 12년 만에 16강 진출이란 성과를 거둔 벤투 감독과는 달리, 클린스만 감독은 세계 무대에서 맹활약하는 최고의 선수를 데리고도 근무 태만과 전략 부재로 한국 대표팀을 부진의 늪으로 밀어 넣었다는 평가였다. 이처럼 적극적인 모니터링과 피드백에 참여해야 한국 사회의 인센티브가 재가동되면서 산업의 역동성을 회복할 수 있다.

김은환 전 삼성경제연구소 경영전략실장 serikeh@gmail.com
정리=이규열 기자 ky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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