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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4 (화)

일본 멸망 위해 아침 저녁으로…‘멸왜기도문’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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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전남 장흥 석대들 전투에서 숨진 무명의 동학농민군들이 안장된 장흥공설공원묘지 3묘역. 당시 희생자 2000여명 중 1699명이 영면하고 있다. 김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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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같은 왜적 놈을…일야 간에 멸하고서…한의 원수까지 갚겠습니다.”



(사)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지난 20일 전남 장흥군의 지원으로 출판한 고 성암 김재계 선생의 유고집에 실린 ‘멸왜기도문’이다. ‘멸왜기도운동’은 천도교단이 1938년 교도들에게 일본을 멸망시키기 위해 아침·저녁식사를 하기 전 기도문을 외우도록 했던 ‘무인 독립운동’을 말한다. 천도교에선 “동학농민혁명, 3·1 운동과 함께 천도교의 3대 민족·독립운동”으로 꼽는다.



이번 유고집 출간은 위의환 전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의 노력 덕분이다. 위씨는 현 천도교 기관지인 ‘신인간’의 심국보 편집장한테서 1910년부터 1937년까지 발행됐던 ‘천도교회월보’ 사본을 구해 기존에 판독이 어려웠던 부분을 해독했다. 위씨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130개 넘는 각주를 붙이고, 일부는 괄호 안에 해석을 달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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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암 김재계 선생의 유고집. 위의환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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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집은 성암 선생이 1924~36년 ‘천도교회월보’에 기고한 교회사를 다룬 글과 동학 관련 글, 추모사 등 1100장 분량의 원고와 멸왜기도사건을 보도했던 신문 기사, 성암 선생 관련 연구자들의 논문이 실려 있다. 천도교회월보는 총 296호를 내면서 발매금지 34회, 정간 1회, 벌금 1회 등의 수난을 겪다가 결국 폐간됐다. 위씨는 “일제의 검열 때문에 직접 항일독립운동을 주창한 글은 없다”고 말했다.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기억을 담은 글(천도교회월보 1934년 8월호)이 눈에 띈다. “갑오년도 이제로부터 40년 전이다. 내가 일곱 살 먹던 그해다. (…) 어느 날 정착 기포가 되었는데 우리 아버지도 행군 중에 같이 가시게 되었고 삼촌도 가시게 되었다. (…) 식이 끝나자 나팔소리를 따라 대군은 움직인다. (…) 나는 어쩐지 한결같이 가고 싶었다. 오리만큼 따라갔다가 (…) 야단하는 바람에 (…) 집으로 다시 돌아올 적에 퍽 섭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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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암 김재계 선생. 위의환씨 제공


장흥 회진면 덕도 출신인 성암 선생의 아버지도 ‘농민군’이었다. 부친 김규현은 동생 양현과 농민군으로 참전했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당시 동학농민혁명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던 장흥 석대들에서 농민군 2천여명이 희생돼 탐진강이 붉게 흘렀다. 성암 선생이 1902년 4월 동학에 입교한 것도 부친의 영향이 컸다. 동학은 1905년 3세 교주 손병희 선생에 의해 천도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장흥 천도교 교구장이었던 성암 선생은 1919년 3월15일 장흥 대덕면 장날 천도교 교인들과 만세운동을 했다. 동료 11명과 함께 나주헌병대에 구속됐던 그는 광주형무소(교도소)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보석으로 석방됐다. 위씨는 “장흥 만세운동은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계승한 천도교와 살아남았던 농민군, 그의 후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지적했다.



장흥 동학 조직의 복원 과정도 천도교회월 1933년 7월 임시호에 실은 글을 통해 밝혔다. ‘고 절암 윤세현씨를 추모함’이라는 글에서 성암 선생은 “윤세현이 1897년 1월 모일에 비로소 고향에 잠입하여 (…) 또다시 동지들을 규합”해 전북 임실의 허선과 상종해 복원됐다고 적었다. 살아남은 동학농민군들은 은밀하고 끈질기게 움직였다. 그러다가 1903년 장흥에서 4명이 동학을 다시 일으킨 혐의로 체포돼 10여일 후에 태형을 맞고 쫓겨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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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환 전 사단법인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 위의환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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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학만 공부했던 성암 선생은 1926년부터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활동하면서 천도교회월보 편집위원으로 12년간 활동했다. “종교사상가이자 종교사가였던 성암은 종단의 금융통”으로 인정받았다. 1938년 2월3일부터 전국에서 동시에 시작된 멸왜기도는 보름만인 2월17일 황해도에서 한 교인의 누설로 발각됐다. 성암 선생은 천도교 4세 교주 춘암 박인호 선생이 비밀리에 지시했다는 것을 끝까지 숨겼다. 위씨는 “가죽 혁대로 맞아 갈비뼈 3개가 부러지고 전기고문을 받았다”고 말했다.



일제는 사건이 크게 확대될 경우 중일전쟁을 수행하는 데 불리하다고 판단해 성암 선생 등 관련자 5명을 70여일 만에 보석으로 석방했다. 성암 선생은 고문 후유증으로 1942년 6월 서울 중구 옥인동 골방에서 세상을 떴다. 1976년 독립유공자 대통령 포장을 받았고, 1991년 8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위씨는 “성암 선생의 생가 복원 문제도 군에서 관심을 갖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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