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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4 (화)

인종·성소수자 잣대에 지쳤다… 외면받는 美 ‘워크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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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선에서 ‘워크’ 사실상 실종

조선일보

2020년 6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시내의 도로에 해시태그(#) 마크와 함께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라는 문구가 그려졌을 때 앞부분을 위에서 찍은 사진. 앞서 전달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에 사망한 사건의 여파로 미국 전역에서 시위가 벌어지면서 ‘워크(WOKE)’ 문화는 정점으로 치달았다.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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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깨어 있어야(stay woke) 합니다. 가장 많이 깨어 있을지(wokest) 좀 더 깨어 있을지(woker) 뭐든 괜찮아요. 다만 덜 깨어 있어선(less woke) 안 됩니다.”

지난달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뒤 공화당 대선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층을 중심으로 소셜미디어에 과거 해리스의 발언 영상이 퍼졌다. 캘리포니아주 연방 상원의원이던 2017년 애플 창립자 스티브 잡스의 배우자이자 자선사업가 로린 파월 잡스와 대담하는 장면이다. 해리스는 ‘워크’라는 말을 변형시키면서까지 여러 차례 쓰며 ‘깨어 있자’고 강조했다. 이 동영상이 퍼지면서 보수층을 중심으로 해리스에 대해 ‘공산주의자’ ‘극단적’이라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해리스 캠프와 민주당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2010년대 중반부터 미국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워크(woke)’ 문화가 급격히 힘을 잃으면서 대선 캠페인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영국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가 19일 보도했다. ‘깨어 있다’는 뜻을 가진 ‘워크’는 백인과 남성, 가족주의라는 주류의 차별에 맞서 소수층 권익을 지켜낸다는 의미가 있다. 다양성의 가치를 중시하는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와도 같은 맥락이다.

이 때문에 소수 인종과 성소수자의 지지세가 강한 민주당은 과거 선거 때마다 주요 인사들이 선거 캠페인에서 ‘워크’라는 단어를 무기처럼 사용하며 지지층 결집에 활용했다. 이런 풍경이 올해 대선에서는 사라졌다. 해리스와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인 팀 월즈 미네소타 주지사의 유세장 연설에서는 ‘워크’라는 말을 거의 들을 수 없다.

민주당이 2016년과 2020년 대선에서 공화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맞서 ‘워크’ 담론을 적극적으로 의제화했던 것과는 정반대다. 주요 언론들이 ‘워크의 부활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표현할 정도다. 해리스와 민주당 인사들의 입에서 ‘워크’가 사라진 데 대해 이코노미스트는 “이 단어가 세상을 희생자와 억압자로 나누는 경향이 있는 가장 공격적인 활동가들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근 미국 사회 전반에서 뚜렷하게 감지되고 있는 ‘워크’의 퇴조가 정치권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은 점점 덜 깨어 있게(less woke) 됐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워크’에 대한 (미국 사회 내) 논의가 2020년대 초에 최고조에 달한 이후 눈에 띄게 감소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여론·미디어·기업 등 사회 주요 분야에서 ‘워크’ 문화의 영향이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대중의 인식 역시 ‘워크’에 역행하는 사례가 늘었다는 것이다.

이런 흐름을 보여주는 사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미국의 맥주 ‘버드라이트’는 지난 3월부터 격투기 선수 더스틴 포이리에(35)를 간판 모델로 기용했다. 앞서 지난해 6월 ‘프라이드 먼스(Pride Month·성소수자 인권의 달)’을 맞아 트랜스젠더 인플루언서 딜런 멀베이니(28)를 모델로 쓰고 무지개색(동성애의 상징색)으로 병을 포장한 맥주를 출시했다가 불매운동과 매출 폭락을 겪고 취한 조치다.

미국 전역에서 2000여 곳의 대형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타깃’도 올해 프라이드 먼스 행사 규모를 대폭 축소했다. 지난해 트랜스젠더용 의류 등 ‘프라이드 컬렉션’을 공개했다가 소비자의 반발에 부딪혔고, 23년 만에 최장 기간 주가가 하락하면서 시가총액이 130억달러(약 17조4000억원)가량 증발하는 사태를 겪은 뒤 나온 변화다.

‘워크’의 퇴조세는 대학가에서도 두드러진다. 텍사스대는 올해 초 성차별 문제와 성소수자 인권 문제 등을 전담하던 학내 기관인 ‘젠더 및 성(Gender and Sexuality) 센터’를 폐쇄하고, 인종·성 다양성 전담 일자리 60여 개를 없앴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도 교직원 채용 시 후보자에게 다양성 관련 입장문을 의무적으로 제출토록 하는 규정을 없앴다. 워싱턴타임스에 따르면 올해 5월까지 최소 22주 158개 대학이 다양성 관련 프로그램 규모를 축소했다. 다양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오히려 인종 갈등과 분열을 야기하고 있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조선일보

그래픽=양인성


‘워크’ 운동은 2014년 미주리주 퍼거슨에서 18세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이 경찰 총격에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점화된 뒤 인종을 넘어 성차별·성소수자 이슈 등으로 확장됐다. 특히 2017년 할리우드 내 성폭력을 폭로한 ‘미투 운동’이 미국 전역으로 번져나가고, 2020년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미국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거대 담론이 됐다. 하지만 새로운 인종 갈등, 성전환 선수의 여성 스포츠 경기 참여 등 ‘워크’와 관련한 각종 논란이 불거지면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평가다. 도덕적 우월성을 내세우는 ‘보여주기식’으로 전락해 사회 분열과 정치 양극화의 주범이 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주요 여론조사에서 “인종 차별에 대해 걱정한다”고 응답한 미국 시민은 2021년 48%에 달했지만, 최근에는 35%까지 감소했다. 반면 “트랜스젠더 학생들이 생물학적 성별이 아닌 자신이 선택한 성별로 스포츠 대회에 참가해선 안 된다”고 응답한 이들은 2022년 53%에서 올해 61%로 급격히 늘었다. ‘반(反)워크’ 흐름은 기업의 채용 행태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스타벅스·컴캐스트·아마존 등 미국 기업들은 2016년 이후 다양성을 내세우며 소수 인종 우대 정책을 폈다가 각종 법적 소송에 휘말렸다. 이런 상황을 본 다른 기업들도 ‘워크’를 경영 리스크로 판단하고 줄줄이 관련 정책을 폐기했다.

☞워크(woke)

미국 사회의 인종·성·성정체성 등의 분야에서 소수자가 차별받는 데 대해 저항한다는 뜻. 깨어 있다(wake)의 과거분사(woken)를 흑인들이 ‘워크(woke)’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했다. 또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에 반발해 비아냥거리는 용어로도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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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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