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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5 (수)

[동인문학상] 9월 독회, 본심 후보작 심사평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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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55주년을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 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명교·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서울 종로구 운니동 ‘송죽헌’에서 월례 독회를 열고 최근 출간된 소설을 검토했습니다. 9월 독회 추천작은 강정아의 장편소설 ‘책방, 나라사랑’(강)과 위수정 소설집 ‘우리에게 없는 밤’(문학과지성사)입니다. 1~9월까지 선정된 후보작 중 최종 심사를 거쳐, 올해 수상작을 선정하게 됩니다.

조선일보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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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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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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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정명교·문학평론가

조선일보

정명교 문학평론가


♦책방, 나라사랑

투명한 글쓰기의 양상과 의미

강정아의 ‘책방, 나라사랑’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성은 문체의 투명성이다. 가령 이런 대목을 보자.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언니는 그 대학에서 제일 예쁘고 인기 있는 여학생이었다. 만나는 모든 남자들이 언니를 보기만 하면 반했다. (p.31)

이 짧은 두 문장은 문장과 의미가 그대로 일치한다. 어떤 암시도, 숨은 의미도, 내포도, 비유도 없다. 다른 작가의 작품과 비교해 보자.

아이는 소녀와 함께 있으면서 그 맑은 눈과 건강한 볼과 머리카락 향기에 온전히 홀린 마음으로 그네를 바라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소녀 편에서는 차차 말없이 자기를 쳐다보기만 하는 아이에게 마음 한구석으로 어떤 부족감을 느끼는 듯했다. (황순원, ‘별’)

이 작품의 아이도 소녀를 ‘바라본다.’ 이 바라봄의 의미를 독자는 상당량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그 의미를 감추어두고 있다. 아이가 보는 소녀는 무엇이 궁금할까? 또한 독자는? 그건 아이의 시선에서 아이의 ‘소망’을 짐작할 수 있으나, 그 소망의 실행에 대해서는 알지 못해서 궁금증을 자아낸다는 것을 가리킨다. 아이의 눈길은 현재에 계류되어 있으며, 미래를 갈망한다. 반면 강정아 소설의 앞 대목에선 모든 게 드러나 있다. 감정도, 행동도, 사건도.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또 다음 대목들과도 비교해보자.

(1) 잘 차려입고 짙은 향수를 뿌린 늘씬하고 아름다운 남녀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는 미인을 바라볼 때의 남자들처럼 동공이 스르르 풀리는 것을 느낀다. (조경란, ‘혀’)

(2)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봤더니 민이가 숨을 참으며 웃고 있었다. 그애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내리면서 더 큰 소리로 웃었다. (정한아, ‘달의 바다’)

(1)에서는 실행(봄 직후의 반응)이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 실행의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 혹은 아주 무기력하다. 어떤 경우든 이 행동에는 주체의 능동성이 결여되어 있다. 게다가 이 실행을 추동한 생각 자체가 일반성으로 위장되어 있다. 이 묘사는 무의식 속의 어떤 다른 욕망에 대한 암시로 읽어야 한다.

(2)의 ‘민’의 웃음은 눈이 마주친 데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이 반응은 속마음을 은폐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이상의 예와 달리, 강정아 소설의 묘사는 곧바로 실제를 지시한다. 언어와 사태 사이에는 어떤 간극도 없다. 가끔 간극이 벌어지긴 하지만, 곧바로 메워진다. 심지어 간극에 대한 불안이 자주 노출된다.

그해 늦봄의 어느 날 수돗가에서 언니는 멋진 남자 선배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끔씩 언니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남자가 더할 수 없이 멋진 사람이라는 데 동의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내가 공감하지 못하자 언니는 더 열성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진 그 남자에 대해 묘사하고 또 설명했다. 목소리가 좋고 연설을 잘한다는 것은 그렇다 쳐도 실없는 농담을 잘하고, 나무를 잘 타고, 시골에서 나고 자랐다는 점이 어떻게 그 많은 외모의 결점들을 커버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pp.39~40)

이런 글쓰기 앞에서, 사르트르의 유명한 언명. “산문의 언어는 기호이고 시의 언어는 사물이다”라는 주장이 떠오르는 건 자연스런 일이다. 사르트르는 산문의 기호성을 ‘언어는 철저한 도구’라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산문이 어떤 기도를 위한 탁월한 도구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면. 말을 초월적인 입장에서 관조(觀照)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시인의 경우뿐이라면. 우리는 산문가에 대해서 우선 다음과 같이 물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당신은 무슨 목적으로 글을 쓰는가? 당신은 어떤 기도로 나선 것인가? 그리고 그 기도는 어떤 이유에서 글쓰기라는 수단을 필요로 하는 것인가?” 한데. 이 기도는 어떠한 경우라도 순수한 관조를 목적으로 삼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직관(直觀)은 침묵이며 언어의 목적은 전달에 있기 때문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명환 역)

사르트르의 이런 입장을 간명하게 요약하는 명제가 있다. 그것은 “말한다는 것은 행동한다는 것이다”이며, 그에 대한 비유로서의 “말이란 탄약을 장전한 권총이다. 말을 한다는 것은 권총을 쏘는 것이다”이다.

사르트르의 이런 주장에 대해 이미 수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오늘의 목표는 이 논란 안으로 다시 한 번 들어가는 게 아니다. 지금 주목할 것은, 이런 방식의 글쓰기가 21세기 들어 급증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젊은 세대의 자연발생적 작품 만들기가 증가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병발적 현상이다. 그런데 이런 글쓰기의 상당수는 사태에 대한 즉각적인 신체적 반응들이다. 글은 표현 충동이 집중적으로 몰려든 길일 뿐이고, 그 길의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날 이 길의 필연성에 대한 자각이 발생할 때, 저 신체적 글쓰기는 근본적인 특이점을 맞이할 것이고, 그때 신체적 반응은 완전히 다른 언어 궤도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아쉽게도 아직까지는 그런 ‘진화’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반면 강정아 소설의 글쓰기는 사태와 언어의 간극이 없다는 점에서는 똑같지만, 신체적 반응이 아니다. 이는 세상에 대해 이미 내린 명확한 판단의 적용이다. 즉 이 글쓰기는 의미의 단일성을 기반으로 존재하며, 그 불변하는 의미를 폭우 후의 강물처럼 흘려보내는 과정이 소설의 전개에 해당한다.

♦우리에게 없는 밤

불가해한 몸의 흐름을 타고 마음의 돛단배는 종말의 절벽 쪽으로 끌려가는데…

위수정의 ‘우리에게 없는 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현실의 흐름에 느슨하게 끌려가는 존재들이다. 그들의 움직임에는 감정적인 흥분도 보이고 지적인 호기심도 읽히고, 스스로 이행하는 의지도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들은 격렬하지 않고 매우 조용해서 독자가 의식하고 읽을 때에만 감지할 수 있다. 또한 각 인물들의 행동에는 저마다의 행렬이 있다. 그들 사이에는 사연의 공통점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현대인들의 총체적 고립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의 삶 밑바닥을 관류하는 공통의 느낌이 있다. 지금 몰락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몰락의 근원에는 제각각 다른 양태로 나타나는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충동은 아주 은밀히 작동해 당사자도 결코 의식하지 못하고 오로지 몸으로만 표현된다는 것. 그러니 독자가 직전에 ‘현실의 흐림’이라고 파악했던 것은 실상 인물들의 비자각적 몸의 움직임이라는 것.

그리고 곰곰이 들여다보면, 이 불가해한 행동들의 밑바닥에 유사한 강박관념을 짐작게 하는 단서들이 보인다. 그것은 무언가 뺏길 것 같은 초조함, 혹은 숨죽이고 사는 내면에서 폭발할 것 같은 숨은 감정이 주는 불안, 또는 저마다의 고립된 삶이 혼돈으로 치닫고 말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이 침묵의 몸짓들은 SNS를 필두로 한 오늘날의 모든 미디어가 뜨거운 홍염을 일으키면서 작렬(炸裂)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요란 법석에 짓눌린 채로 허덕거리는 작은 개인들의 신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진단하기에는 그들의 몸의 충동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다. 그것들은 자신의 완전성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결코 달성될 수 없는 완전성에 대한 강박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라고 파악할 수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신음이든 강박이든 이 저마다 다른 양태들은, 저마다 고립되어 있다는 공통된 감정을 공유하고 있으며, 그것이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읽힌다는 점이다. 그렇게 읽게끔 이 작품들에서 쓰인 문장들은 오늘날의 현실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일상적 관용어법들을 상당수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이는 자기애 사회가 자기 중력을 못 이긴 막바지에서 ‘빅 크런치’를 일으키기 직전인 상황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아수라 같은 고함의 용광로 안에 갇힌 채 제각각의 내면으로 도피한 작은 기포들의 무참한 소산인가? 아니면 종말의 다양한 원인들을 망라하면서 생의 공허감을 미세한 감정의 분말들로 뿌려대는 것인가? 두고 생각해 볼 문제이다.

구효서·소설가

조선일보

소설가 구효서


♦우리에게 없는 밤

위수정의 두 번째 소설집 ‘우리에게 없는 밤’에는 표제작인 ‘우리에게 없는 밤’을 비롯해 모두 열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우리에게 없는 밤은 대체 어떤 밤일까 궁금했는데 본문에 딱 적혀 있다. 성용욱이라는 가수가 짙은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발라드 ‘겨울 숲’의 가사를 인용한 것. 세상을 온통 뒤덮은 차가운 눈이 모든 걸 평등하게 한다는 내용의 가사.

그럼 우리에게 없는 밤이란 그 평등의 밤이겠다. ‘우리’를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소설 속 두 인물인 지수와 은선을 상정할 수밖에 없다. 지수는 고등학생 때부터 조건만남을 해 오는 대학 2학년생이다. 절친 동거인인 은선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해 번 돈을 집/길고양이를 위해 모두 쓰는 진심 캣맘이다.

그런 ‘우리’에게 평등의 밤이 없다니 대뜸 불평등의 밤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는 불평등한 밤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아닌 것 같다. 지수와 은선이 돈이 없거나, 그래서 더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소설은 이들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불평등한 형편에 놓여 있는지 구체적인 정보를 내놓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에게 없는 밤’에서는 조건만남과 아르바이트만으로는 사회적인 불평등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 다른 단편 ‘멜론’과 ‘몬스테라 키우기’도 자칫 부와 그것의 모순적 분배에 대한 비판으로 읽힐 수 있고 현실적으로 타당한 문제의식이기도 하겠으나 소설이 목적하는바 지향점은 아닌 것 같다. ‘겨울 숲’의 긴 가사를 보면 짙은도 평등을 그런 차원의 평등으로 노래하지 않는 것 같기는 하지만 하여튼 그래도 짙은은 차가운 눈이 모든 걸 평등하게 해, 라고 노래하고 위수정은 우리에게 그런 밤은 없다, 라고 말하는 게 차이라면 차이다.

평등과 불평등을 말하거나 불평등에서 평등으로 나아가는 등의 얘기를 나눌라치면 평등이라는 말에 대한 개념적 이해를 공유해야 하는데 위수정은 ‘평등’이라는 말이 생겨나기 이전의 공백으로 하염없이 가버리는 듯하다. 그래서 평등의 밤뿐만 아니라 불평등의 밤도 우리에겐 없는 것.

없는 것은 비단 평등과 불평등의 밤뿐만이 아니다. 사랑과의 이별의 밤, 불륜 혹은 도덕의 밤, 진실과 거짓의 밤, 양심과 믿음의 밤, 안정과 불안의 밤, 아름답거나 추한 밤도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위수정의 소설들은 기본적으로 아득하고 불온해 보이며 그것이 우리를 유혹한다.

웬만하면 매혹이라고 할 만한데 그것의 결과가 이득이나 만족이 아니라 혼란과 손해 쪽에 가까운 듯하여, 그럼에도 못내 뿌리칠 수 없어서 유혹이라고 해 둘 수밖에 없다. 소설 속 주요인물들이 끝내 처하게 되는 사정도 그래서 하나같이 위태롭다. 다른 남자를 사랑하여 남편을 두고 집을 나와서는 돌아가지 않는 ‘나’(‘아무도’), 은행에서 거금을 횡령하여 아낌없이 쓰면서 유랑하는 ‘나’(‘집’), 트럭에 뛰어들어 죽는 바람에 애먼 트럭 기사를 곤경에 빠트린 ‘나’와, 본의 아니게 사람을 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기는 마찬가지인 트럭 운전기사(’몸과 빛’), 남편의 계속되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정선 카지노에 살면서 빚만 늘여가는 혜신(’9′), ‘존나 추하다’는 멸시를 받으면서도 젊은 남자 피아니스트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65세의 원희(’오후만 있던 일요일’), 그리고 짙은의 노래가 반복 재생되듯이 조건만남을 계속하며 ‘폐허 속으로 한없이 가라앉는’ 지수(‘우리에게 없는 밤’)가 그렇다.

‘폐허 속으로 한없이 가라앉는(158쪽)’이라고 했듯이, 의지적이든 비의 지적이든 위수정 소설의 인물들이 향하는 지점은 무너졌다가 복원되거나 회복되는 ‘집’이 아니라 더 무너져 흔적조차 없는 폐허인 듯하다. 일찍이 한강의 단편 ‘회복하는 인간’이 말 그대로 회복하는 인간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던 것처럼 위수정의 인물들도 회복하거나, 그리하여 일상으로 복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떠나 온 삶의 되풀이, 즉 그것의 패배적인 반복 재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짙은의 노래는 반복 재생되지만 폐허를 향한 지수와 많은 ‘나’들의 침잠은 비가역적이다. 다시 돌아올 길을 스스로 끊기에 그 행로는 매 순간의 단절을 가져온다. 이전과의 그 어떤 연속성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야만 폐허 속으로의 ‘한없는’ 가라앉음이 가능해진다.

‘아무도’에서 ‘나’는 노숙인이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집이 없는 사람이 되어 아무거나 먹고 아무나와 자고 소중한 것을 서서히 잊어가는 상태를. 안온한 일상이 존재하지 않는 나날을. 친구와 가족과 이름을 버리고. 집착도 사랑도 모르는. 그렇게 죽음에 노출되어 하루하루 연명해가는 삶을. 결코 자살은 하지 않고.’(39쪽)

노숙인이 이럴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폐허에 이른 자를 다만 노숙인이라고 다르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인물들의 사정과 분위기가 위태롭다고 했으나 겉보기일 뿐 실은 그렇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폐허에 이르는 여정을 극구 피하거나 적어도 힘써 지체하거나 유보하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노숙인이 되어도 ‘좋겠다’고 하지 않은가. 폐허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뜻도 되겠다. 여기에 유혹의 핵심이 자리하는 게 아닐까.

자고로, 모름지기, 마땅하다 하여 반복 재생되어 왔던 것들과의 완전 단절. 두렵기도 하겠지만 존재를 뒤흔들 만큼의 떨림이 동반될 듯도 하다. ‘결코 자살은 하지’ 않으니 폐허 뒤로도 생은 어떻게든 나아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 규모와 방식과 강도는 사람에 따라 다 다를지라도 가히 그것을 ‘혁명’이라고 부르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위수정의 소설들은 그 신화의 순간들을 매우 사소하면서도 일상적이고 친근하게 꾸려서, 오후의 커피가 적당히 식어가는 우리의 책상 위에 가만히 가져다 놓는다.

이승우·소설가

조선일보

소설가 이승우


♦책방, 나라사랑

이 소설은 험악한 시대의 흉기에 삶을 빼앗긴 이들의 이야기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면, 민주화를 위한 시위 도중 진압 경찰의 방패에 머리를 가격당해 의식을 잃고, 겨우 깨어났으나 어린아이 지능을 가진 아이로 살아가야 하는 언니와, 그 언니를 지켜보며 길고 울퉁불퉁한 성장의 시기를 건너가는 동생의 이야기다. 그 딸들과 한 몸처럼 엮인 ‘엄마’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세 모녀는 “한 몸의 팔다리같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뻗어 있었지만 서로 꼭 붙어” 사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시대의 희생양인 언니를 가운데 두고 한몸이나 다름없는 ‘엄마’와 ‘나’가 겪은 이야기이다. 소설 속 화자는 이들이 서로에게 짐이었기에 아무도 죽지 않고 살았다고 서술한다. “엄마는 언니 때문에 죽지 못하고 살아야 했다. 언니도, 아마 엄마와 내가 없었다면 그렇게 힘겹게 죽음의 문턱을 넘어 다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살아갈 더 이상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 때도 내가 없으면 살아갈 힘이 없는 엄마와 언니라는 짐 때문에 힘을 냈다.” 가족은 서로에게 짐이 되고, 서로의 짐을 짐으로써 이 이해할 수 없고 거친, 시끄럽고 모순으로 가득 찬 세상을 헤쳐왔다.

이 소설의 인물들에게 세계는 ‘그때’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자신의 삶을 빼앗긴 사람은 시위대에게 공격당한 언니만이 아니다. ‘나’의 삶도 그때 사라졌다. ‘대장’이었던 언니가 쓰러진 그때, 이제까지 자기를 둘러싸고 있던 안전하고 친숙한 세계가 무너져 내리고, 상상해본 적 없는 괴상한 것들로 가득 채워진 다른 세계가 새로 만들어졌다고 화자는 고백한다. 그 새로운, 다른 세계는 “언니를 잡아먹은 자리에서 시작되었다.” 이 다른 세계는 다른 삶을 요구한다. 그런데 ‘나’가 가진 세상에 대응할 자원은 이전 세계, 사라진 세계에서 터득된 것이다. 그 세계에 맞춤한 자원을 가지고는 이 낯선 새로운 세계에 대응할 수 없다. 그래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좌충우돌한다. 세상에 대한 미움과 냉소, 언니에 대한 연민과 불만이 뒤섞이고, 그런 자신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런 긴 시간의 방황을 거쳐 천천히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작가는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사려 깊은 문장에 담아냈다. 무엇보다 민주화 운동이라는 큰 그림의 한쪽 면을 부각하여 거기 참여한 개인(들)의 실존의 디테일을 세밀하게 묘사한 것이 돋보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개별적인 아픔과 복잡미묘한 감정들이 저 큰 벽화의 잘 보이지 않은 구석구석에 음영으로 그려져 있는지, 멀리 떨어져서 큰 벽화를 감상하지만 말고, 가까이 다가와서 돋보기를 들이대고 그 희미하고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라고 속삭이는 작가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단순한 후일담 소설이 아니고, 그저 그런 성장소설만도 아니다. 한 시대가 겪은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 그 시대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끝난다면, 그것도 물론 대단한 성과이지만, 오래 기억되지는 않을 것이다. 달라진, 낯선 세계에 부딪히고 원망하고 갈등하고 좌절하고 방황하는 인물을 그리는 이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사유와 성찰이 들어가 있는 문장이다. 가령 이런 문장. “무언가에 떠밀려 살다 보면 네 그림자가 네 앞에 있는 걸 보게 될 때가 있을 거야. 그럴 때는 단호하게 뒤돌아서야 해. 그쪽이 빛의 방향이야. 어떤 사람이 훌륭한 삶을 살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자기의 그림자를 어떻게 다스렸느냐에 달려 있어.” 그리고 또 이런 문장. “민중을 대신해 그들의 자유와 해방을 찾아주기 위해 거리로 나갔던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언니는 그 위험한 거리에 섰던 것이다. 자존심이 상해서, 화가 나서, 무어라도 해야 해서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소설의 가장 큰 단점은 제목이다. 제목은 문패, 혹은 이정표와 같은 것인데, 다 읽고 나서 든 가장 의문이 이것이었다. 어쩌자고 출판사는 이 제목으로 책을 낼 용기를 낸 것일까.

김인숙·소설가

조선일보

소설가 김인숙


♦책방, 나라사랑

‘책방, 나라사랑’ 이라는 이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서야 나온다. 무엇을 기대하고 읽든 독자들이 이 소설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거대한 고통과 슬픔과 상실이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온전히 개인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와 개인이 분리될 수 있을까. 단 한 번이라도, 한순간이라도, 어떤 한 사람에게라도 그런 일이 가능한 적이 있었을까.

소설은 과거 군부 정권하에서 민주화 시위에 참여하던 중 심각한 부상을 당한 한 여대생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너무나 익숙하게 자행되고 반복된 일이라 그 디테일한 설명을 덧붙이는 게 구차하게 여겨질 정도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하다. 각별하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그런 일이 벌어진 정황과 그런 일을 벌어지게 한 시대가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난 이후의 시대와 정황에 대해 말한다. 살아남은 자를- 그래야 했을까, 그러지 않는 편이 나았을까 - 돌보며 그 비극을 감내해야 하는 가족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들을 잊고, 그들을 잊는 편이 낫다고 선택하고, 그들을 기꺼이 잊어버린 시대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소설의 화자는 부상의 후유증으로 7살짜리 아이로 돌아간 언니의 동생이다. 언니는 7살로 돌아갔지만, 시대는 흘러간다. 누군가는 성취했다고 하고, 누군가는 발전했다고 하는 시대.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사람들의 시대. 더 많이는, 외면하는 사람들의 시대. 그래도 이 가족에게 삶은 계속된다. 그들에게 이 삶은, 이 삶을 담은 시대는 얼마나 비열한가.

이 소설은 마치 자서전처럼 읽히기까지 한다. 그토록 정밀하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배경이 아니라 그 시대를 관통한 마음의 묘사가 그렇다는 뜻이다. 소설에서 화자는 늘 도망치는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무언가를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설령 그 무언가가 상실과 수치에 대한 공포라고 하더라도, 그토록 절박하게 도망치지는 못할 것이다. 돌아가, ‘나라사랑’라는 간판을 붙인 책방을 열지도 못할 것이다.

‘우리의 삶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증거가 필요했다’ 소설 속 한 문장이다. 작가는 이 소설로 첫 책을 펴냈다. 단단하고 깊다. 작가는 이 첫 책을 위해 아주 오래 거짓말이 아니라는 증거들을 찾아다녔을 것이다. 그 증거들이 문장에서 행간에서 오롯이 드러난다.

김동식·문학평론가

조선일보

김동식 문학평론가


♦우리에게 없는 밤

소설집 ‘우리에게 없는 밤’이 눈에 띄었던 것은, 글 쓰는 이가 과문한 탓이기는 하겠지만, 이처럼 직접적인 욕망을 가진 소설 주인공들을 보았던 적이 최근 몇 년 동안에는 거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해당 소설들의 내용을 간추리는 과정에서는 추문에 가까운 사건을 다루고 있음을 한눈에 알게 되는데, 실제로 작품을 읽어 가는 동안에는 추문이라는 생각이나 도덕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지는 않았다. 아마도 등장인물의 강렬한 욕망을 기술하는 투명한 문체와 어조(tone)가 빚어낸 일종의 착시현상이 아니었을까 한다.

위수정의 소설의 주인공들은 욕망의 승화에 저항한다. 화학이나 물리학에서 고체가 액체를 거치지 않고 기체가 되는 현상을 승화라고 부르듯이, 인간의 욕망이 성적·동물적 차원에 고정되지 않고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수준으로 전화되는 과정을 또한 승화라고 한다. 욕망의 성적인 측면을 비(非)성적인 차원으로 전환시키는 승화의 과정이 마련되어 있기에, 인간이 사회, 문화, 도덕, 예술 등을 건설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승화의 과정에서 동물적인 것 또는 천박한 것은 억압된다. 이 억압된 욕망의 편린들을 불러내는 과정이 탈(脫)승화이다. 위수정 소설의 인물들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욕망의 승화에 저항하고 있다. 그리고 탈승화된 욕망에서 자신들의 운명의 표정을 바라본다.

단편 ‘아무도’에서 여주인공 희진은 안정적으로 가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남편 수형은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시댁 식구들과도 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유년기의 외상적 기억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아니다. 누가 보더라도 큰 문제가 없는 가정인데, 희진은 집을 나와서 방을 마련했다.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유부남인 ‘그’와의 섹스를 위한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성적 욕망의 노골적인 충족을 비켜가면서, 행복한 가정 또는 가족이라는 사회적인 가치를 향해서 승화가 일어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희진은 그와 같은 승화에 저항한다.

그래서 그녀의 욕망은 기원을 갖지 않는다. 잃어버린 소중한 그 무엇을 보상하기 위한 욕망도 아니고, 유년기의 외상을 방어하기 위한 욕망도 아니고, 매개항에 의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욕망도 아니며, 다른 사람의 욕망을 욕망함으로써 그 어떤 욕망이 되는 경우도 아니다. 희진의 욕망(그와의 섹스를 위해 집을 나와서 방을 구한다는 욕망) 이전에 마련되어 있는, 욕망의 기원은 없다. 남편과 평온한 가정을 만드는 과정에서 억압되었던(승화되었던) 욕망을 탈승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욕망이라는 사실 말고는 다른 기원을 찾기는 쉽지 않다. 욕망의 탈승화와 잉여쾌락이 겹쳐지고 교차하는 지점들에 위수정 소설의 인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셈이다.

단편 ‘우리에게 없는 밤’의 경우, 대학 2년생 지수와 은선은 초등학교 동창이다. 지수는 고1 때부터 SNS를 통해 성매매를 하며, 은선은 캣맘으로 살아가고 있다. 두 사람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베스라는 고양이를 길에서 발견하고 함께 키웠다. 은선은 고양이를 돌보고 키우는 비용을 마련하느라 학업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녀의 욕망은 베스가 죽기 전에 동물복지가 가장 잘 되어 있는 영국에 가는 것이다. 지수는 성매매 횟수를 늘려서 은선의 캣맘 활동을 경제적으로 지원한다. 은선은 지수에게 영국에 함께 가자고 말하지는 않으며, 지수는 성매매에서 만난 남자와의 (육체적 거래가 아닌) 감정적 교류를 내밀하게 욕망한다.

지수와 은선에게 있어 욕망의 기원은 지극히 불확정적이다. 다만 그들이 자신들의 욕망이 승화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있으며, 현재의 욕망이 또 다른 욕망의 기원이 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그들은 말한다. 나의 욕망은 나의 운명이다, 라고. 그 어떤 운명(영웅, 유명인, 대중문화의 스타 등)을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욕망에서 운명의 표정을 발견하고 있는 사람들. 글 쓰는 이의 얕은 지식이 문제가 되겠지만, 한국문학에서 잘 보지 못하던 인물 유형이 제시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상 심사를 위해 한 번 더 읽어보아도 좋겠다는 생각도 함께 가져 보았다.

[황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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