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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4 (금)

함정에 빠진 韓자본주의 … 관성대로 가면 '예고된 미래'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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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경 명예기자 리포트 ◆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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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 미국 대비 1인당 소득(구매력 평가 기준)이 10%에 불과하던 한국은 1980년에 20%, 즉 상위 중진국 수준에 도달했고, 이어 민주화 투쟁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초 선진국의 기준인 40%에 도달해 중진국 함정을 벗어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 한국 경제는 고성장과 분배 호전이라는 소위 동아시아의 기적을 창출하며 추격형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전형이 됐다.

그러나 OECD 가입의 대가로 단행한 자본자유화 덕에 바로 외환위기에 빠져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 금융의 대가로 각종 영미식 제도를 이식받으면서 영미식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시작했다. 기업의 수익성은 개선됐으나, 동아시아 방식인 이윤의 재투자보다는 배당 요구를 받으면서 30% 중반이었던 총투자율은 30% 내외로 떨어져 저성장 기조가 시작되고 분배 악화와 양극화 현상이 시작됐다. 지니계수로는 0.33 내외로 괜찮은 분배이지만,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주장 이후 새 기준이 된 상위 10%의 소득 비중으로 보면 2010년대 기준으로 45%에 달하는 미국에 이어 한국과 일본 둘 다 40% 초반대까지 오르는 등 분배가 악화됐다. 성장률도 5년마다 1%포인트씩 하락하는 저성장 기조의 정착으로, 저성장·나쁜 분배를 특징으로 하는 영미식 자본주의로의 수렴이라고 볼 만한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나 재벌형 기업 지배구조나 경직적 노동시장 등을 고려할 때 한국이 영미식으로 수렴한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자본주의는 어떤 유형이라고 해야 할까. 자본주의 유형론에 따르면 대체로 4가지 유형을 이야기한다. 첫째, 저성장·나쁜 분배·높은 고용률을 보이는 영미식 자유방임 자본주의. 둘째, 고성장·좋은 분배·높은 고용률의 북구식 시장조정형 자본주의. 셋째, 그 중간으로서 중성장·중분배·낮은 고용률의 유럽대륙식 혼합자본주의. 마지막으로 고성장·좋은 분배·높은 고용률이라는 기적을 창출한 동아시아 자본주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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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필자의 클러스터 통계 분석에 따르면 한국과 일본은 이제 저성장, 나쁜 분배로 영미식 국가들과 같은 클러스터로 분류되고, 대만은 북구와 같이 묶이게 된다. 동아시아 자본주의 그룹은 공중분해돼 이제 사라져 버렸다. 그러면 한국은 현재 어느 유형인지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몇 가지 지표를 가지고 한국을 OECD 국가들과 비교해 보자.

우선 한국의 현재 상대적 1인당 소득 수준은 미국 대비 70%에 달하며 서구 열강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와 일본 수준에 수렴했다. 사회지표들을 보면 기대수명 79년, 범죄율 5.4로 세계 최고 수준인 미국에 비해 한국은 세계 최장의 기대수명(83년), 낮은 범죄율(0.7), 낮은 이혼율 등으로 볼 때 일본과 이탈리아, 스페인과 같은 그룹으로 분류돼, '안전한 자본주의'라고 불릴 만하다. 즉, 극단적으로 '위험한 자본주의'라고 할 만한 미국과는 완전히 다른 좋은 사회지표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900시간이라는 최장 노동시간, 28명이라는 최고 자살률, 30%에 달하는 최대 남녀 임금 격차 등 지표 면에서는 한국은 다른 어떤 OECD 국가와도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의 극단치를 보여주고 있다.

반면 노조조직률은 미국과 비슷하게 낮지만, 그 외 노동시장 성과와 정책 면에서 보면 한국은 영미식보다는 유럽대륙형 자본주의식과 유사한 면을 보이고 있다. 가령, 해고의 어려움 정도에서 미국이 0.1로 매우 낮은 반면, 한국은 2.4로 유럽 대륙 국가의 평균과 비슷하다. 노동자의 교육훈련, 고용에 대한 인센티브, 일자리 창출 노력 등 소위 적극적 노동시장에 쓰는 비용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율을 보면, 한국이 0.4%로 북구 평균인 1%나 유럽대륙 평균인 0.6%보다는 낮지만, 이런 분야에 전혀 돈을 쓰지 않는 미국의 0.1%보다는 많이 높다. 즉, 한국은 소위 유연하면서도 안정적 노동시장 제도로 낮은 실업률을 자랑하는 북구형 자본주의보다는 좀 더 경직적이면서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덜 쓰는 유럽대륙형 자본주의에 가깝다. 직업훈련 등 적극적 노동시장에 들어가는 예산 비율이 아직 매우 낮고, 그나마 정부 돈으로 직접적으로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데 더 많이 쓴다는 점에서, 그 반대인 북구로부터 더 배워야 한다.

마지막으로 정치제도와 민주주의 지수를 보면, 10점 만점에 8.3으로 미국의 7.9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고 있으나, 9점대를 넘는 북구보다는 낮다. 미국보다 먼저 여성 대통령을 뽑았고, 평화적으로 정권교체나 탄핵을 진행할 수 있다는 면에서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부패 지수도 북구보다는 아직 더 높고 역시 미국, 영국과 비슷한 수준이어서 '청렴하지 않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을 정리하면 한국은 성장률과 분배 등 거시 지표와 민주주의 수준 면에서는 영미식 자유방임 자본주의와 같은 그룹에 속한다. 기대수명, 범죄 등 사회지표 면에서 일부 남유럽과 같이 안전한 자본주의에 속한다. 긴 노동시간, 남녀 임금 차이에서는 다른 어떤 나라와도 비슷하지 않은 예외 그룹이고, 노동시장 경직성에서는 유럽대륙형 혼합자본주의와 비슷하다. 하지만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등 북구 조정형 자본주의의 정책도 추구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은 동아시아 자본주의로 출발해 고성장과 좋은 분배라는 기적을 창출하며 서구열강 수준으로 소득을 수렴했으나 외환위기 이후 저성장, 분배 악화의 길로 들어서서 영미식 자본주의로의 수렴 경향이 일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 상황은 어떤 특정의 서구 자본주의로 일관되게 수렴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고, 지표에 따라 각기 다른 서구자본주의 국가군과 비슷하게 나타나서 수렴은 수렴인데, 여전히 서구자본주의와는 다른 자본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기적은 끝나기는 했지만 동아시아 자본주의에서 출발해 선진자본주의로 가는 또 하나의 길을 한국이 개척했다고 자부심을 가질 만한 점도 있다.

이를 좀 더 행복하고 역동적 자본주의로 만드는 길은 명확하다. 한국은 어떤 특정 유형에 수렴할 것이 아니라 각 유형의 장점만을 취해 한국형 새 자본주의를 창조해가면 된다. 현재의 좋은 부분인 고수명, 낮은 범죄라는 '안전한 자본주의' 측면을 유지하되 노동시장을 유연·안정하게 하고, 노동자 직업훈련 재교육 강화·직무급 임금 체계 정립·육아 출산 등 사회 서비스를 확충해 보다 높은 고용률(특히 여성)과 낮은 실업률을 달성하면 된다. 이 길이 저출산·고령화에 대한 효과적 중·단기 대응이다. 인공지능(AI)과 같은 파괴적 혁신의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사람들이 계속 새로운 기능과 숙련을 익혀 평생 고생산성 일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AI에 기반한 자동화·디지털화는 민간회사뿐만 아니라, 의료·교육 서비스 부문에 적극 도입해 지역 간 이중구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분배는 선진자본주의 모든 나라에서 악화하고 있는데 그 공통 원인인 자산(금융·부동산 등)에 기반한 소득에서의 차이를 축소하는 조세정책 등이 필요하다.

즉, 다른 선진국들은 세전 분배 불평등도는 높으나 세후 불평등도는 대폭 떨어지는데, 한국은 그 반대로서 조세의 재분배 기능이 작동하지 않고 있는 점을 개선해야 한다. 그동안 보수·진보 정권을 넘어서는 일관된 추세가, 저조세 저복지에서 중조세 중복지로 가는 것이었는데, 최근 그 반대로 역주행하는 조짐이 보인다. 기업 차원에서는 이윤을 재투자·노동성과급·배당이라는 세 부분으로 사용하는 데 있어 적절한 균형 유지로, 성장과 분배 간에 조화가 필요하다.

※이 글은 필자가 'Review of Evolutionary Political Economy'에 게재하여 최우수 논문상을 받은 논문의 내용을 요약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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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 서울대 경제학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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