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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 (토)

한강, 5·18과 4·3 배경으로 인간 탐구… 역사성·문학성 인정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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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원이 밝힌 ‘한강의 작품 세계’

한국 최초, 아시아 여성 최초. 영예로운 최초 기록을 줄줄이 세운 소설가 한강(54)이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정답은 한림원 발표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스웨덴 한림원 노벨위원회의 안데르스 올슨 위원장은 10일(현지 시각) 선정 결과를 밝히며 한강의 주요 작품 10편에 관해 논평했다. 노벨위원회는 세계 각국 전문가 자문을 거쳐 후보를 20명 안팎으로 좁히고, 최종 후보를 5명으로 추려 그해 수상자를 선정한다. 선정 위원들은 최종 후보로 올린 5명의 작가가 쓴 모든 작품을 읽는 것이 원칙. 한강 작품을 섭렵하고 쓴 한림원의 논평은 그의 작품 세계에 관한 검증된 결과물이다.

◇가장 비중 있게 논평한 세 편

한림원이 가장 비중 있게 다룬 작품은 ‘소년이 온다’(2014), ‘흰’(2018), ‘작별하지 않는다’(2021) 등 세 편. ‘소년이 온다’에 대해 한림원은 “한강은 자신이 자란 도시 광주에서 1980년에 벌어진 역사적 사건을 정치적 배경으로 삼는다”며 “소설은 희생자에게 목소리를 부여하고, 잔혹한 현실을 생생히 그려내 ‘증인 문학(witness literature)’이라는 장르에 접근해간다”고 했다.

조선일보

그래픽=김성규


미학적 성취에 대한 찬사도 아끼지 않았다. 역사성과 문학성을 동시에 갖춘 작품으로 본 것이다. 한림원은 “환영이 어른거리는 듯하면서도 간결한 스타일로 우리의 예상을 비켜간다. 묻을 수 없는 신원 미상의 시체들을 볼 때는, 소포클레스 ‘안티고네’의 모티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 서구 문학의 원형(原形)으로 꼽히는 고대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를 언급한 것은 근원을 깊이 탐구하는 작가의 경향을 추켜세운 것이다.

‘흰’은 한강의 소설 중 가장 시적인 작품이다. 흰 이미지를 나열하면서 훼손되지 않은 순백의 순수함을 환기한다. 한림원은 “작중 화자의 언니가 될 뻔한, 태어난 지 불과 두 시간 만에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헌정하는 비가(悲歌·elegy)”라고 요약했다. “흰색 사물들에 관한 짧은 단상들이 이어진다. 소설이라기보다 일종의 ‘세속적 기도서’에 가깝다”고 했다.

◇'작별하지...’ 이미지와 진실의 균형

노벨문학상은 작가에게 주는 상이지만, 도드라지는 작품이 있다. 최근 수상자 아니 에르노는 ‘단순한 열정’, 밥 딜런은 ‘Blowin’ in the Wind’, 페터 한트케는 ‘관객 모독’ 같은 식이다. 한림원은 한강의 최근작 ‘작별하지 않는다’에 대해 198단어로 비중 있게 논평했다. ‘소년이 온다’(155단어), ‘흰’(143단어)보다 중요한 작품으로 꼽은 것이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을 고통스럽게 애도하는 소설. 한림원은 “1940년대 후반 한국 제주도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의 그림자를 들춘다”며 “압축적이고 정확한 이미지로 과거가 현재에 미치는 영향뿐 아니라 집단 망각에 빠진 상태를 드러내려고 끈질기게 시도한다”고 평했다. “악몽 같은 이미지, 진실을 말하려는 증언 문학의 사이를 독창적으로 오간다”고도 했다. 한강은 이 소설로 지난해 11월 프랑스 4대 문학상 중 하나로 꼽히는 메디치 외국어문학상을 받았다.

◇한림원이 꼽은 추천 리스트

2016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당시 맨부커상)을 거머쥐며 세계에 이름을 알린 그의 대표작 ‘채식주의자’(2007)에 대해서는 “주인공이 섭식이라는 규범을 거부하자 뒤따르는 폭력적인 결과를 그린다”고 했다. 장편 ‘희랍어 시간’(2011)은 “상실·친밀감·언어의 궁극적인 조건에 관한 아름다운 명상”이라고 했다. ‘소년이 온다’ 전까지는 역사성보다는 미학성이 돋보였던 것이다.

이 밖에 한림원은 소설집 ‘노랑무늬영원’(2012)에 실린 단편 ‘회복하는 인간’을 언급하며 “한강 문학은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의 중첩을 특징으로 한다. 진정한 회복이 이뤄지지 않고, 고통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실존 경험으로 부상한다”고 했다. ‘회복하는 인간’은 2013년 한국어와 영어가 동시 표기된 책으로 별도 출간돼 한림원이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노벨위원회는 한강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 추천할 책으로 ‘채식주의자’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를 꼽았다.

[황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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