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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 (목)

타인의 고통 한가운데 선 한강, 기어이 인간의 존엄을 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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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16년 5월 세계 3대 문학상인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받은 한강이 서울 마포구 서교동 한 카페에서 열린 신작 소설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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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기념해 한국 문학 전문가들이 이번 수상의 의미를 짚고 이를 계기로 한국 문학의 나아갈 바를 진단하는 연쇄 특별기고를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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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한림원은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한강 작가를 선정했다. 한림원 쪽이 주목한 한강 작품의 특징은 크게 세가지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했다는 것, 몸과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관계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보여준다는 것, 그리고 시적이고 실험적인 스타일로 현대 산문을 혁신했다는 것. 물론 이 특징들이 한강 문학의 매력 전부를 설명한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이 주제를 통해 한강 문학에 접근하는 일은 가능하다. 특히 최근 10년간 전세계적으로 번역돼 세계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한 ‘채식주의자’(2007), ‘소년이 온다’(2014), ‘작별하지 않는다’(2021)는 이런 한강만의 문학적 특징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이 세 작품은 모두 모종의 고통과 마주한 민감하고 연약한 개인이 고통을 통해 고통받는 존재들과 깊이 교감하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준다. 물론 고통에 대응하는 방식과 그 결과는 각각 다르다. 그러나 이 소설들은 모두 고통을 이야기 끝까지 밀어붙여 기어이 고통의 윤리에 도달한다. 그 점에서 이들 작품을 ‘고통 3부작’이라 불러도 좋다.



우선 ‘채식주의자’. 이 소설은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이라는 각각 제목의 이야기가 엮여 있는 연작소설이다. 이 소설은 서로 다른 세 사람의 시선으로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였던 영혜가 채식주의자에서 패륜아로, 급기야 정신병자로 변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특히 마지막 소설인 ‘나무불꽃’에서 영혜는 스스로를 ‘나무’라고 상상하기에 이른다. 이 기이한 탈인간 프로젝트는 어쩌다 시작됐을까? 근원에는 영혜가 어린 시절 목격한 개의 도살 장면이 있다. 부드러운 육질을 위해 개를 오토바이 뒤에 매달아 개가 죽을 때까지 동네를 달리고, 그렇게 죽은 개를 마을 사람들이 모여 먹어치우는 장면. 이때 어느 누구도 죽어가는 개의 고통스러운 얼굴에 주목하지 않는다. 오직 영혜만이 “녀석의 덜렁거리는 네 다리, 눈꺼풀이 열린, 핏물이 고인 눈을” 뚫어지게 응시한다. 그리고 억압된 폭력의 기억은 성인이 된 영혜에게 자기 학대의 방식으로 돌아온다.



영혜에게 채식은 결코 건강이나 신념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채식은 생존을 핑계로 다른 생명을 함부로 죽이는 폭력적 질서에 대한 거부이자, 한때나마 그런 질서에 순응했던 자신에 대한 자책에 가깝다. 나아가 채식은 자기 경계 밖 존재들과의 관계 맺기에 대한 고민과도 이어진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저 생명들을 어찌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타자의 고통에 가닿을 수 있는가? 어쩌면 우리가 타자가 되지 않는 한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결국 나무가 된 영혜는 “경계 저편으로 넘어가” 영원한 타자가 된다. 타자의 고통에 공명하다가 자기 붕괴에 이르는 이 극단적 타자-되기. 어쩌면 폭력적 세계와 일말의 타협도 없이, 문학적으로 한 인물을 끝까지 밀어붙여 경계 밖으로 밀어버리는 이 극단적 과격함이야말로 세계의 독자를 사로잡은 매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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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마련된 한강 작가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설치물 인근에서 ‘소년이 온다’를 살펴보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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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을 감지해서 자신의 고통으로 삼을 수 있다는 건 인간의 고귀함을 증언하는 최후의 방어선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타인의 고통 때문에 생기는 개인적 고통, 그 지극히 감각적인 고통에 대해서 쓰고 싶었어요.” ‘소년이 온다’의 문제의식을 담은 한강의 말이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광주의 생존자들이 당시 계엄군의 총에 죽은 소년 동호를 끊임없이 현재로 소환하면서 떠나보내지 못하는 고통과 죄의식을 다룬다. 이들은 모두 1980년 광주를 현재의 사건으로 앓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죽은 자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자기 존재의 일부로 받아들임으로써 고통을 현재화한다. 작가도 마찬가지. 소설의 에필로그에서 한강으로 짐작되는 소설가 ‘나’는 과거 광주에서의 죽음과 고통을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1980년 광주의 고통은 ‘나’의 내부로 스며들고 ‘나’는 과거의 죽음과 고통의 목소리를 내면화한다. 이는 작가의 자의식을 지우고 스스로 그 목소리가 되는 문학적 비약이다.



이어진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의 이야기가 고통을 쓰다가 고통을 앓고, 고통을 앓다가 죽음을 예감하는 작가의 실제 체험에서 시작하는 것은 그 점에서 상징적이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서두는 ‘소년의 온다’의 에필로그에서 이어진다. 소설에서 작가인 ‘나’는 ‘그 책’(‘소년이 온다’)을 쓰고 난 뒤 끔찍한 두통과 위경련에 시달리다가 심지어 죽음까지 결심한다. 그런 ‘나’의 고통에서 시작한 소설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고통의 연속이다. 잘린 손가락의 신경을 살리기 위해 3분마다 바늘에 찔려야 하는 친구 인선의 끔찍한 치료의 고통, 제주 인선의 집에 가는 동안 ‘나’가 느낀 죽음과도 같은 추위와 고립의 고통, 인선 집에 도착한 뒤 시작된 오한과 두통, 구토로 이어지는 신체적 고통, 그리고 제주 4·3의 망자들과 생존자들이 겪어야 했던 학살과 고문과 기다림의 고통. 특히 ‘나’와 인선이 겪는 끔찍한 육체적 고통을 펼쳐놓은 1부를 읽다 보면 마치 그 고통이 나의 몸에서 일어나는 것 같은 감각의 착각마저 일으킨다. 도대체 작가는 왜 이렇게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가?



작가는 말한다.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 ―뻔뻔스럽게― 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쓰기와 고통은 하나다. 글쓰기란 불가피한 고통을 무릅쓰고 끔찍한 고통의 한가운데로 자발적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고통은 “수동성보다 더 수동적인 수동성”(레비나스)이지만 자발적으로 고통을 겪는 ‘나’는 능동적 주체다. 그리하여 ‘나’는 다짐한다. 자기의 신체 위에 포개지는 죽은 자들의 고통을 회피하지 않겠다고. 그들과 결코 ‘작별하지 않는다’고. 한강의 소설은 그 자체가 이 다짐이다. 그렇게 한강의 소설은 보여준다. 이 세상 모든 고통받는 존재들의 연대를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그 고통의 연대 속에서도 기어이 빛을 발하는 인간의 존엄을.



한겨레

심진경 문학평론가. 본인 제공


심진경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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