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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 (목)

의료개혁, 조삼모사와 조사모삼은 엄연히 다르다 [뉴스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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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지난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 의대 융합관 박희택홀에서 열린 ‘의료개혁, 어디로 가는가’ 토론회에서 의사들이 패널들의 발언을 듣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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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 사회정책부장



인도의 펀자브주에서 벌어진 일이다. 주정부는 농부들이 물과 전기를 공짜로 쓸 수 있어 과다하게 물을 자기 농지에 끌어들임에 따라 지표수 고갈을 염려했다. 이에 2010년 1월 전기에 요금을 부과하고 대신 그만큼 보조금 지급을 약속했다. 하지만 농민협회(영향력이 매우 큰 단체다)는 주정부 조처를 믿지 않았고 극렬히 반대했다. 결국 10개월 뒤 이 정책은 철회됐고, 주정부 재무장관은 물러나야 했다. 8년 뒤 옛 재무장관이 돌아와 이번엔 정책 순서를 바꿨다. 보조금을 먼저 지급하고, 전기 요금을 물리기로 했다. 이마저도 전면 시행이 아닌 시범사업을 통해 차근차근 시행했다. 반발은 누그러졌고, 정책은 대상을 서서히 넓혀가며 시행 중이다.



2019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매사추세츠공대(MIT) 에스테르 뒤플로, 아비지트 바네르지 교수가 펴낸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에 나온 사례다. 현실에서 ‘조삼모사’와 ‘조사모삼’은 크게 다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정부 정책의 정교함의 정도는 성공 여부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의료개혁도 마찬가지다. 영화 ‘아저씨’에선 “내일만 보고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에게 죽는다”지만, 실제론 임기가 정해진 정부가 내일도 의사로 살아갈 이들에게 판판이 져왔다. 의료정책은 환자와 시민의 생명과 직결돼 더욱 신중하게 추진돼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갈수록 인재들이 의대로 빨려 들어가는 ‘의대 블랙홀’도 당연히 고려해야 한다.



올 2월 ‘의대 정원 2천명 증원’을 발표하며 의료개혁에 시동을 건 윤석열 정부는 과거와 다를 것이라고 자신했다. 대통령은 지난 4월 대국민 담화에서 “역대 정부들이 9번 싸워 9번 모두 졌고, 이제는 결코 그러한 실패를 반복할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은 기회 있을 때마다 “가장 핵심적인 국정과제 중 하나로, 2022년부터 꾸준히 의료개혁을 준비해왔다”고도 했다.



꾸준한 준비는 만반의 준비가 아니었다. 의료개혁의 본질인 필수·지역의료 강화를 위한 필요조건인 상급병원 구조 전환이나 수가 조정 등은 충분조건인 의대 증원보다 뒤늦게 나왔다. 더욱이 공공의료 확충 방안은 제대로 검토조차 안 되고 있다. 그사이 의료개혁은 곧 의대 증원이 되고 말았다.



더욱이 전공의들이 중환자실·응급실마저 내팽개치는 염치없는 반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의료공백 초기, 사직서를 제출한 전공의들을 향한 엄정 대응 엄포는 뒤집힌 지 오래다. 오히려 조규홍 장관이 전공의들을 향해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라고 사과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번엔 다를 것이라는 호언장담과 달리 과거 정부가 실패한 길로 접어드는 중이다. 길어지는 의료공백에 대한 국민의 불편과 불안에, 정부는 설득은커녕 ‘응급실은 문제없다’며 오히려 화를 돋우기까지 했다.



의료개혁은 파산 지경이다. 10년 뒤 나올 필수의료 분야와 지역에 정주할 전문의가 얼마나 배출될지 확실하지 않다. 대신 내년 의사 3천명, 전문의 3천명 배출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 그사이 환자와 국민들은 ‘아프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과 걱정을 7개월 넘게 되풀이하고 있다.



이를 뒤집기 위해서는 윤석열 대통령의 사과가 필요하다. 지난 10일 열린 서울의대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 주최 토론회에서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비서관은 지난 주장을 반복했다. 대통령실이 처음으로 의료계와 대화에 나섰지만, 입장차만 보여주고 끝났다. 서울의대 비대위가 다른 의사 단체의 비난에도 대화의 손을 먼저 내밀었지만, 정부는 기존 입장만 앞세웠다. 결국 의료공백 해소를 위한 의정 간 대화 가능성은 더욱 낮아졌다. 정부 태도에 변화를 가져오고, 정책에 유연함을 살릴 계기는 윤 대통령의 사과에서 시작될 수 있다.



윤석열 정부는 임기 반환점을 앞두고 있다. 이제 2년 반밖에 안 남은 동시에 2년 반이나 남았다. 정부가 내건 ‘4+1 개혁’. 연금·교육·노동개혁과 의료개혁, 저출생으로 인한 인구 위기 극복 가운데, 좌초 위기인 동시에 그나마 유일하게 가시화된 것도 의료개혁이다. 이를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윤 대통령의 사과가 필요하다.



조규홍 장관은 지난 7일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의 윤 대통령 사과 요구에 “대통령이 판단할 사항”이라고 말했다. 그 말대로 대통령이 판단해, 사과할 때다.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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