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0.20 (일)

유용한 사람보다 절실한 ‘덜 해로운 사람’…그래서 지칠 수 없는 교육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

지난 4월4일 서울 강남구 양재천을 찾은 관내 어린이집 원아들이 생태체험 학습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잘못된 해석 중 하나는 생명이 변화해가는 과정을 목적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목적론적 관점으로 진화를 본다면 생명의 변화는 부단히 어딘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과정으로 해석된다. 이 해석에 따르면 생명 현상이 목적에 다다른 정도가 높을수록, 또는 생명의 모습이 목적한 바에 가까울수록 일종의 진보를 성취한 것으로 판단하게 된다. 하지만 진화는 변화하는 생명이 적응하는 과정이지 진보하는 과정이 아니다. 자칫 이러한 잘못된 오해는 우리를 우생학으로 이끈다.



우생학은 현존하는 생명체들의 상태, 즉 그들의 형질 차이를 우열의 기준으로 삼는다. 다양한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모습의 형질은 생명체 네트워크가 맺는 분주한 상호작용의 흐름을 타고 만들어지고 변화하며 매 순간 새로워진다. 이처럼 다양성은 생명체의 기본 속성이자 핵심 속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목적론적 관점에 치우치면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다양성은 경쟁을 통해 제거되어야 할 속성 정도로 취급된다. 하지만 생명은 어떤 목적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생명 자체가 삶의 공리이자 목적이다.





자연·사회와 올바른 관계 맺기 배워야





교육은 호흡과 마찬가지로 대표적인 생명활동이다. ‘교육하다’(educate)의 어원은 ‘이끌어낸다’는 뜻을 담고 있다. 생을 살아가는 개체가 스스로 사회와 자연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역량을 외부에서 주워 담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끌어내는 과정이다. 물론 교육기관으로서의 학교는 후속 기관에 인재를 배출해야 한다는 사회적 기능을 담지하고 있다. 한때 교육부가 교육인적자원부라는 명칭을 사용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능적 요소를 교육의 핵심으로 삼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교육이라는 생명활동을 활발히 진행하는 과정에서 시대와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는 제반 요소를 고려하는 흐름의 순서가 타당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은 교육과정에 참여한 사람들이 제 모습을 발견하고 자기다움을 기르는 것이며 더 나아가 주변 사람들과 자연을 이해하고 그것들과의 조화로운 삶을 꿈꾸고 준비하는 과정이다. 즉 교육은 자신과 주변 사람, 사물을 서로 연결하며 총체적 자아를 자신이 처한 맥락 속에서 형성하면서 ‘나라는 존재가 세계 속에 지니는 책임’과 ‘세계가 나에 대해 지니고 있는 책임’을 바르게 이해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교육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펼치는 상호유기적 생명활동과 직결되어 있다.



교육은 생명체들이 먹이사슬로 연결된 채 그 관계 속에서 탄소, 질소, 인, 물이 순환하듯이, 인류 역사 이래 누적되어온 지식과 지혜를 서로 대화하고 토론하고 성찰하면서 나누고 순환시키고 발전시키는 과정이다. 온갖 모양과 특색을 지닌 생명체들이 시공간을 나눠 쓰며 상보성을 발휘하여 먹이와 빛을 공유하듯이, 교육은 다양한 개체들이 서로 다른 목소리로 대화하는 법을 배우고, 서로의 빈틈을 채우는 법을 배우고, 서로를 튼튼하게 만드는 법을 일깨우는 과정이다. 생태계가 다양성이라는 덕목을 통해 높은 생산성과 환경 변화에 대한 저항성을 지닐 수 있듯이, 학교라는 공동체 역시 모든 구성원이 지닌 소질과 성향과 외양의 차이라는 덕목을 통해 교육을 수행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오로지 그 차이에 대한 존중을 통해서만 그 구성원들은 서로 교육될 수 있다.



교육은 곧 생명활동의 일부라는 입장을 가지고 현재 우리의 교육 현실을 살펴보면 여러 문제가 보인다. 우리의 교육은 지나치게 목적 지향적이고, 인적 자원 개발의 관점에 치중되어 있으며, 그 결과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깨뜨리고 있다. 우리의 교육은 능력주의의 토양에서 뼈대만 앙상하게 자란 나무에 비유될 수 있다. 높이 경쟁을 하며 잎사귀도 없이 자라난 나무들은 기괴하기 이를 데 없다. 인격이라는 열매가 맺히는 데 쓰일 양분까지 모조리 키를 키우는 데 써버린 나무들은 생태계의 상호보완성을 알지 못한다. 사회는 쉼 없이 우열과 순위를 가리고 그에 비례해 삶을 보장한다. 다양성도 관계도 사라진 사회의 교육은 지극히 반생명적이다. 높은 성적과 그에 따른 입시 결과라는 목적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교육은 본질에서 교육이 아니다. 결과에 매몰된 채 배타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길러진 추론 능력은 남을 해치는 무기에 가깝다.





성찰 없는 ‘전문가’들의 폐해





자신을 형성하며 변화시키는 세상 모든 관계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고, 자신의 한계와 타인의 덕목을 정확하게 이해하며, 세계는 쉼 없는 작용들의 변화를 통해 구성된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협력하고 소통하며 배려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우리 시대 교육에 주어진 과제일 것이다. 이러한 교육은 배우는 이들이 자신의 지능이나 주어진 환경 등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떨치게 만든다. 그리고 머릿속 신경회로가 신경세포의 가소성에 기반하여 쉼 없이 재구성되듯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성장하는 자아를 깨닫게 한다. 이러한 자존감은 앞서 말했듯 교육을 하나의 생명활동으로 볼 때 비로소 형성될 수 있다.



아마도 이렇게 교육받은 이들이 이전보다 더 쓸모 있지는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사회의 유용한 인물들만큼 사회에 유용하진 않더라도 이 사회에 덜 해로운 사람들이 지금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인재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교육은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다. 미래를 이끌 인적 자원을 배양하고 선발하는 과정이 미래의 지속가능성을 깨뜨리고 있다. 현실적으로 교육의 목적은 자아의 성장과 인적 자원 개발이라는 두 가지 필수 요소로 구성될 것이지만 이 두 요소는 병렬 관계에 있다기보다 귀속 관계에 있다. 시민으로서 인간으로서 사회와 자연에 어떤 존재로 관계 맺을지 성찰하지 못한 전문가라는 인적 자원들이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우리는 매일 목도하고 있다. 피로감 때문일까? 서울시 교육감 보궐선거 투표율이 23.5%에 그쳤다. 하지만 지칠 수 없는 일이 교육일 것이다. 그것은 미래의 생명을 일구는 일이며 더 나아가 생명의 미래를 보장하는 일이다. 부디 살아 있는 교육을 통해 모든 아이들의 생기가 되살아나길 염원한다.





남창훈│대구경북과학기술원 교수



서울대와 프랑스 퀴리연구소, 영국 케임브리지 분자생물학연구소에서 생화학·면역학 등을 공부했다.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한 수용체 개발, 노화와 면역 사이의 연관 등을 연구하면서 대학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부단히 모색 중이다. ‘탐구한다는 것’, ‘이타주의자’, ‘소년소녀, 과학하라!’ 등의 책을 썼다.





▶▶권력에 타협하지 않는 언론, 한겨레 [후원하기]

▶▶한겨레 뉴스레터 모아보기

▶▶행운을 높이는 오늘의 운세, 타로, 메뉴 추천 [확인하기]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