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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2 (화)

[청계광장]조상의 넋이 담긴 종합 영양식품 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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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권오길 강원대학교 생명과학과 명예교수




옛날부터 씨나락(볍씨) 파종 전날엔 야사(夜事)도 삼갔다는데 농사에 정성을 다 쏟던 옛 어른들의 심성이 가득 묻어 있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농사는 천하의 가장 큰 근본이 되는 중요한 일임)이라! 정성스레 심은 무와 배추는 석 달이 다 될 즈음에 통배추엔 샛노란 고갱이가 꽉 차고 미인 '장딴지'만 한 통무는 밭둑에 다리를 반만 내놓고 멋을 부린다. '추상(秋霜)같은 된서리'가 내리기 전에 배추는 짚대로 싸매주고 무는 서둘러 뽑아 머리 무청은 잘라내어 지푸라기로 머리채 땋듯이 엮어 응달에 달아매니 역시 한국 음식의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무시래기다.

'풋내 나는 겉절이 인생이 아닌 농익은 김치인생을 살라'고 했다. 그런데 김치가 제맛을 내려면 배추가 다섯 번 죽어야 한단다. 배추가 땅에서 뽑힐 때 한 번 죽고 통배추의 배가 갈라지면서 또 죽고 소금에 절여지면서 다시 죽고 매운 고춧가루와 짠 젓갈에 범벅이 돼 또다시 죽고 마지막으로 장독에 담겨 땅에 묻혀서 비로소 제대로 된 김치맛을 낸다.

집사람의 김장도우미는 늘 나였다. 참으로 손이 많이 가는 김장하기다! 김칫거리는 배추와 무가 주지만 열무, 갓, 파, 양배추, 고들빼기, 씀바귀 등 지방에 따라 주된 자료가 일흔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무를 숭덩숭덩 잘라 채를 쳐 고춧가루 듬뿍 흩뿌리고 찹쌀풀, 다진 마늘, 으깬 생강, 신안 천일염, 집간장, 설탕, 조미료 등 온갖 양념에 아미노산 덩어리인 멸치젓, 어리굴젓, 새우젓을 두루 넣어 맨손으로 주물럭주물럭, 뒤적거린다. 나중에 배춧잎 사이 사이에 고루 집어넣을 김치의 소다. 생새우나 생갈치, 생태도 지역마다 다르다.

그런데 왜 우리 안사람은 비닐, 고무장갑을 끼지 않고 '맨손'으로 저렇게 마구 섞고 있을까. 손바닥이나 손가락 사이에는 미생물(세균)들이 묻어 있어서 그것들이 발효를 도우니 무침에는 손 '땟국'이 들어가야 제맛을 낸다.

맨손은 그렇다 치고 고추장, 깍두기, 동치미, 김장에 왜 찹쌀이나 멥쌀, 밀가루로 풀을 쑤어넣는 것일까. 세균들의 번식(발효)에 쓸 먹잇감인 배지(培地·medium)인 셈이다. 그랬구나! 푸성귀나 양념에 든 양분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하니 그렇게 먹을거리 풀을 보충해준다. 그리고 보통 미생물들은 짠 소금에 죽지만 염분에 끄떡 않는 내염성세균(耐鹽性細菌)인 젖산균(유산균)이 김치를 익힌다. 즉, 손바닥이나 생채(生菜)들에 묻어 있던 젖산세균이 발효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아내는 김치를 통에 넣고 힘들여 꼭꼭 눌러댄다. 왜? 김치에 사는 젖산균들은 산소가 있으면 되레 죽어버리는 혐기성세균(嫌氣性細菌)이기에 공기를 다 뺀다. 결론으로 소금에 죽지 않고 산소를 싫어하며 낮은 온도를 좋아하는 젖산균(유산균·乳酸菌·lactic acid bacteria)들이 김치맛을 낸다. 김칫독을 응달에 묻어두면 겨우내 그 속의 온도가 변함없이 영하 1℃ 근방을 유지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그것을 본떠 만든 것이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있는 '김치냉장고'가 아니든가.

이런 여러 젖산균이 발효하면서 시원한 김칫국물인 유기산(有機酸·organic acid)을 내놓으니 그것이 군침을 흘리게 하고 김치 특유의 맛과 향을 낸다. 아주 잘 익은 김치에는 프로바이오틱스(probiotics·활생균)인 유익한 젖산균이 99%요, 다른 세균이나 곰팡이가 1% 정도 들었다. 세력 좋은 젖산균 세상도 잠깐 시간이 가면서 산도(酸度·acidity)가 떨어지면서(시어지면서) 어느 순간 젖산균이 맥을 못 추고 시들시들 죽는다. 이때 여태 숨죽이고 있던 효모(곰팡이)무리가 득세하면서 김치에서 군내가 나고 국물이 초가 되니 일종의 썩음이며 아주 산패(酸敗)한 묵은 김치에는 젖산균이 거의 없다. 아무튼 김치(kimchi)는 활생균(活生菌)이 가득한, 조상의 넋이 담긴 예사롭지 않은 종합 영양식품이다! (권오길 강원대학교 생명과학과 명예교수)

권오길 강원대학교 생명과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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