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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3 (수)

의정갈등, 시간은 그 누구의 무기도 아니다 [아침햇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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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의정갈등이 이어지고 있는 22일 오전 서울 한 대형병원 응급의료센터 앞에 빈 병상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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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보연 | 논설위원



“양쪽이 상대방에게 이야기하지 마시고요. 의료 소비자인 저한테 설명해준다 생각하고 말하세요.”(유미화 녹색소비자연대 상임대표)



지난 10일 정부와 의료계의 공개토론은 매우 기괴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상호 토론은 금지됐고 사회자에게 각자 입장을 설명하는 것만 허용됐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의대 증원 사태 8개월 만에 의정이 공개토론에 나섰지만, 제3자를 통해 대화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해법이 제대로 논의될 리 만무하다. 대통령실 사회수석은 의대 2천명 증원의 당위성을, 서울대 의대 교수는 의료비 증가를 초래하는 의사 증원의 부당함을 부각시키느라 바빴다. 이마저도 의료계 내부에선 “의료농단 주범들과 야합하는 이적 행위”라는 반발이 나왔다.



추석 연휴를 정점으로 응급의료 고비를 넘기면서 의-정이 긴 교착 상태에 빠졌다. 장기간 평행선을 달려온 의-정 간 대화는 이런 정도로 어려운 일이 됐다. 다행히 의사단체 두곳이 22일 여야의정 협의체 참여 의사를 밝혔으나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의대생 휴학 승인 문제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와 대한의학회가 일단 손을 들었다. 하지만 이들 단체가 의료계 전체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갈등의 핵심 쟁점인 2025학년도 증원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논의는 공전될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대화와 협상이 지지부진했던 것은 정부와 의료계 모두 사태 해결을 위해 각자의 명분을 내려놓을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전 대책 없이 무리한 증원을 밀어붙인 정부는 2025학년도 대입 수시전형이 시작되면서 현실적으로 정책 후퇴가 어려워진 상태다. 윤석열 대통령으로선 지지율이 곤두박질치는 상황에서 그나마 국민 지지를 얻어온 의료개혁을 포기할 리 없다. 의료계와의 대화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지만 최소한의 위기관리만 하면서 시간을 벌겠다는 의도가 빤히 보인다. 지난 8월 이주호 교육부 장관이 ‘6개월만 버티면 이긴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논란이 일었는데, 실제 그 말대로 해왔는지도 모른다.



의사들은 어떤가. 대한의사협회는 지도부가 탄핵 위기에 몰려 있고, 의대 교수들도 전공의 눈치를 살피느라 협상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의료공백을 초래한 당사자인 전공의들은 최소한 1년은 복귀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사태 초기 생계 부담에 어려움을 겪던 이들도 재취업을 한 뒤로는 다급함이 사라졌다. 지난달 19일 기준 사직 레지던트 9016명 중 3114명(34.5%)은 개원가를 비롯한 다른 의료기관에 취업했다. 급할 것이 없는 의료계는 단일한 의견을 모으기는커녕 내부 분열과 반목이 극심한 상태다.



올해 의대생 휴학·유급으로 내년에 7500명이 한꺼번에 교육을 받을 수 있냐는 우려가 크지만 새 학기라고 전원 복귀를 장담하기도 어렵다. 최근 교육부가 내년 3월 복귀를 조건으로 휴학 승인을 한다고 하자, 전공의 대표는 “복학은커녕 내년 신입생들도 선배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전공의들도 내년 3월 수련병원에 돌아오려면 12월에 지원을 마쳐야 가능한 일이다.



갈등이 길어질수록 국민이 치러야 할 후과도 커진다. 정부가 땜질식 대책으로 의료공백을 근근이 메워가더라도 환자들의 피해는 계속 쌓여간다. 진단 및 수술·치료 지연 등으로 인한 가시화되지 않은 피해는 제대로 집계조차 되지 않고 있다. 올해 2~6월 전국 상급종합병원에서 암 수술을 받은 환자 수는 한해 전보다 16.3%나 줄었다. 의사 수를 늘리려는 정책이 거꾸로 의사 배출을 막아버린 의도치 않은 결과도 빚어지고 있다. 올해 의사국가시험 실기시험 합격자는 266명으로 평년의 10% 수준이다. 내년 전문의 자격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전공의 수도 올해의 20% 정도에 그친다. 업무 부담이 커진 필수의료 분야 전문의들이 하나둘씩 이탈하면서 생긴 여파도 고스란히 환자들의 몫이다.



시화호 개발이나 밀양 송전선로 건설 등 그간의 사회적 갈등은 대체로 큰 비용을 치른 뒤에야 정치적 주목을 받고 대통령과 국회 등 영향력이 큰 제3자의 압력으로 대화 창구가 열리는 양상을 보여왔다.(김광구 경희대 교수, ‘갈등해소를 위한 대화협의체 형성 동인에 관한 연구’) 의료개혁은 정부와 의료계가 풀 수밖에 없다. 최소한 의사 수를 어떤 기구에서 어떤 근거로 정할 것인지에 관한 타협안이 나와야 한다. 이를 위한 특단의 방안이 없다면 여야의정 협의체가 열리더라도 시간만 허비할 공산이 크다. 시간은 어느 쪽의 무기도 될 수 없다. 환자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흉기가 될 뿐이다. 의·정 모두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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