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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3 (수)

[특파원 리포트] “우리는 지금이 전성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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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지난 11일 뉴욕 맨해튼에 있는 '맨해튼 몰'에 조성된 오징어 게임 체험 테마파크에서 독일에서 온 일가족이 드라마에 나오는 인형 '영희'를 보며 사진을 찍고 있다./오로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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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2009년 미국 워싱턴DC에서 유학했을 당시 가장 듣기 싫었던 말은 ‘중국에서 왔느냐’는 말이었다. 그때만 해도 현지 사람들은 동양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모두를 중국 사람이라 짐작했고, 아니라 하면 ‘혹시 일본인이냐’라는 말이 돌아왔다. 씁쓸함을 삼키며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상대방은 순진한 얼굴로 “남쪽? 북쪽?”을 물었다. 2009년은 슈퍼주니어의 ‘쏘리쏘리’와 소녀시대의 ‘Gee’가 아시아 음반 시장을 강타하고, 드라마 ‘선덕여왕’ ‘아이리스’같은 대작이 해외 수출로 큰 성과를 낸 해였다. 그런데도 미국인들이 한국하면 떠올리는 것은 한국전쟁과 분단의 이미지가 먼저였던 것이다. 한국은 충분히 멋있는 나라가 됐는데,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어린 마음엔 말 못 할 설움이 쌓여갔다.

무려 15년 전의 일이 문득 떠오른 건 지난 11일. 뉴욕 맨해튼 중심가에 있는 ‘맨해튼 몰’에 조성된 대형 ‘오징어 게임’ 체험 공간을 취재하면서다. 이날은 마침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바로 다음 날이었다. ‘첫 한국인 노벨문학상’이라는 음절이 주는 벅차오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오징어 게임의 팬이라며 한국 전통 놀이를 즐기는 외국인들을 보고 있자니 가슴속에서 뜨거운 감동 같은 게 솓구쳤던 것이다. 외국인들이 한국이 지구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잘 모르던 때가 있었는데, 뉴욕에서, 독일에서, 영국에서 왔다는 사람들은 어쩌다 ‘영희’ ‘딱지’ 같은 한국어를 곧잘 하고 있단 말인가.

격세지감은 이런 것이다. 이젠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나 그 아이돌 그룹 좋아해’ ‘그 드라마 재밌게 봤어’ 같은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되레 이상하게 느껴진다. 한국 작품이 넷플릭스 비영어권 콘텐츠에서 1위를 하는 것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니고, 그와 비슷하게 누가 빌보드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얘기도 조금은 진부해졌다. 아카데미 봉준호, 쇼팽 콩쿠르 조성진, 그래머폰 임윤찬….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문화 영역에서 한국인이 트로피를 받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덕분에 오직 국적만으로 ‘쿨한 사람’으로 비치는 사치를 부릴 수 있게 됐구나, 내가.”

최근 이른바 ‘Z세대’라 불리는 젊은 테크 업계 종사자 미국인과 저녁을 할 자리가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양식 음식점에는 스테이크, 치킨 알프레도 파스타 같은 음식 사이에 ‘코리안 고추장 치킨윙’을 인기 메뉴로 팔고 있었다. 기자가 그에게 “6·25전쟁이 끝난 지 겨우 70년인데, 요식업에서조차 한국 문화가 인기 트랜드가 되다니 참 신기하다”고 얘기를 꺼내자, 그 친구는 “정말? 나한테 한국은 그냥 원래부터 힙한 나라였는데!”라고 답했다. 한국의 음악, 영화, 심지어 음식까지 어릴 때부터 자연스레 접해온 이 세대의 외국인들에게 나는 더 이상 내 나라를 설명할 필요가 없겠구나. 이런 확신이 드는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누가 뭐라 해도 우리는 지금 일종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실리콘밸리=오로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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