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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3 (수)

[길 잃은 발행어음]④ 아슬아슬 한도로 줄타기 하는 증권사도…업계서 경계 목소리 나오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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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대형 증권사는 크게 ‘종합투자금융회사(종투사)’와 ‘종투사이면서 초대형 투자은행(IB)’인 회사로 나뉜다. 종투사는 증권사가 자기자본의 2배까지 기업에 대출해 줄 수 있고 초대형 IB는 여기에 어음까지 발행할 수 있다. 종투사 시스템이 도입된 지 10년이 넘은 가운데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최근 이 제도를 손보겠다고 밝혔다. 성장성이 있는 기업을 적극적으로 발굴해 자본을 공급하라는 게 애초 도입 취지였는데, 증권사들이 편안히 앉아서 부동산 대출 등으로 과실만 취하고 있다고 판단해서다. 취임한 지 석 달이 안 된 새내기 금융위원장이 지적한 이 제도, 그중에서도 규제가 대폭 완화된 초대형 IB 사업자들의 실상을 짚어봤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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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의도 한국투자증권 본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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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상품이 아니어서 예·적금은 아니지만 그 정도의 위험도라고 생각하면 돼요. 저희 회사가 망하지 않는 이상 원금은 보장되고 (여태까지) 손실을 본 투자자는 없었어요.”

이달 7일 서울 영등포구에 소재한 한국투자증권 영업점에서 기자가 발행어음에 대해 묻자 창구 직원은 이같이 설명했다. 증권사의 금융상품이라 은행 예·적금과 다를뿐더러 과거의 수익률이 미래의 성과를 보장하지 않는데도 이런 영업 행위가 여전히 창구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수조원대의 손실을 낸 라임·옵티머스 펀드와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사태를 거쳤어도 상품 판매 과정에서 적절치 않은 설명은 여전했다.

한국투자증권은 발행어음을 가장 많이 취급하는 증권사다. 한도 소진 직전까지 운용한다. 발행어음은 증권사가 자사 신용으로 발행하는 일종의 채권으로, 자기자본의 2배까지만 발행할 수 있다. 만기가 되면 증권사가 고객에게 원금과 이자를 돌려줘야 하는 상품이다.

다른 증권사들은 돈이 마르는 유동성 위기에 대비해 충분한 여유를 두고 어음을 발행하는 데 반해 한국투자증권의 행보는 도드라진다. 이 탓에 업계에선 한국투자증권에 대한 우려의 시각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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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정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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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금융감독원이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6월 말 기준 한국투자증권의 발행어음 잔액은 15조8800억원으로, 한도(직전 분기 말 자기자본의 2배)의 95.77% 수준이다. 이 수치가 100%를 넘어가면 자본시장법 위반인데 여유를 4.23%포인트(P)만 둔 것이다.

한국투자증권은 관련 사업을 하는 4개 증권사(미래에셋·한국투자·NH투자·KB증권) 중에서 발행어음을 단연 공격적으로 찍은 회사다. 금융위원회는 증권사의 안정적인 지급 여력을 위해 발행어음의 발행 총량을 자기자본의 2배로 제한해 놨는데, 타 증권사들이 절반가량의 여유를 둔 것과 달리 한국투자증권은 한도에 근접해서 발행어음을 팔았다.

미래에셋증권은 한도의 41.26%인 7조7500억원만 발행했다. NH투자증권은 한도의 43.93%인 6조1600억원, KB증권은 한도의 76.58%인 9조6800억원어치의 발행어음을 찍었다. 현재 금융위원회로부터 발행어음을 인가받기 위해 준비 중인 한 증권사 역시 사업을 인가받은 후 한도의 80%가량만 운영할 계획이다. 이 증권사 임원은 “20%는 여유를 둘 계획”이라며 “유동성 위기가 올 수 있기 때문에 (한도에 꽉 맞춰) 타이트하게 운용하진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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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정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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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투자증권은 발행어음 고객 수요를 끌어올리기 위해서도 힘을 줬다. 금리를 통해서다. 발행어음도 은행 예·적금처럼 많은 고객을 끌어들이려면 매력적인 금리를 제시해야 하는데, 4개 증권사 중 한국투자증권의 금리가 단연 높은 수준이다.

만기별로 보면 올해 6월 말 기준 수시형과 만기 30일 발행어음 금리(개인형)는 한국투자증권이 연 3.25%로 가장 높았고, 미래에셋증권(3.20%), NH투자증권(3.00%), KB증권(2.90%) 순이었다. 만기가 가장 긴 12개월형에서도 역시 한국투자증권은 4.00%로 금리가 가장 높았다. 이 외 NH투자·KB증권은 3.80%, 미래에셋증권은 3.75%였다.

이와 관련해 한 증권사 임원은 “한국투자증권은 수신(발행어음을 팔아 고객에게 받은 자금)만 16조원에 달한다”며 “다른 회사가 자금을 못 끌어와서 그런 게 아니다. 최악의 상황을 감안해서 자제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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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투자증권의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 계좌 개설 화면이다. 주식 계좌와 함께 자산관리계좌(CMA)와 중개형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를 패키지 가입하는 방법을 가장 상단에 띄웠다. 이 방법으로 개설되는 CMA는 발행어음형이다./한국투자증권 M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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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좌 개설 영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한국투자증권은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에서 주식 계좌를 개설할 때 자산관리계좌(CMA)와 중개형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를 패키지로 가입하게끔 유도하고 있는데, 이때 개설되는 CMA는 발행어음형이 기본값이다. CMA에는 발행어음 외에도 환매조건부채권(RP)형, 머니마켓펀드(MMF)형, 머니마켓랩(MMW)형 등 종류가 다양함에도 고객이 선택할 여지는 없다. 추후 발행어음 CMA 계좌를 해지했다가, 다시 다른 형태의 CMA를 신청해야 한다.

타사는 그렇지 않다. NH투자증권은 CMA 계좌 개설 시 고객이 RP 또는 발행어음 중에서 선택하게 하고 있으며 미래에셋증권과 KB증권은 RP를 기본값으로 하고 있다. 원한다면 고객은 다른 유형으로 바꿀 수 있다.

이에 대해 한국투자증권 관계자는 “어음 발행의 법정 한도 내에서 신중하게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며 “외부에선 ‘한도가 다 찼다’고 보는 경우가 있는데, (운용하기에 무리 없을 정도로) 한도가 많이 남아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문수빈 기자(bean@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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