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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7 (일)

중의원 선거에 나타난 민의 [세계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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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지난 12일 주요 정당 대표 토론회에서 ‘일본(지방)창생’이란 구호를 들어 보이고 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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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 지로 | 일본 호세이대 법학과 교수



27일 일본 중의원 선거가 치러졌다. 일본은 의원내각제 국가로 총리가 언제든 중의원을 해산할 수 있다. 이달 초 취임한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내각 출범 뒤 중의원 해산을 단행하고 국민 심판을 받겠다고 말했다. 총리 취임 직후 중의원을 해산하는 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상황은 지난 8월 기시다 후미오 당시 총리가 퇴진을 표명하면서 시작됐다. 자민당 내 많은 정치인이 정치자금 수입·지출 보고서 작성을 소홀히 하고, 뒷돈을 챙긴 것에 국민 분노가 높아진 게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져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사퇴를 가져왔다. 자민당 새 리더를 정하는 총재 선거가 지난달 치러졌고, 당내 지지 기반이 약한 것으로 알려진 이시바 후보가 당선됐다.



이시바 총리는 지난 10여년간 자민당 정권의 부패와 정책적 실패를 비판해왔다. 힘센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소신을 지키는 이미지를 지녔다. 일부 자민당 의원들의 정치자금에 대한 감각이 국민적 상식에서 크게 벗어났을 때도 이시바 총재는 일반 국민에게 기대를 받았다. 선거를 앞두고 자민당 이미지 전환을 꾀했던 정치인들도 이시바 총리를 지지했다.



하지만 이시바 총리는 취임하자마자 이전에 했던 말을 뒤집었다. 당 총재 선거 과정에서 다른 후보들이 새 정부 출범 뒤 조기 중의원 선거를 주장했지만, 이시바 후보는 “임시국회에서 예산위원회 개최 등을 통해 정부·여당과 야당이 제대로 논쟁을 벌여 국민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한 뒤 선거를 치르는 게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중의원 조기 해산론은 새 정부 출범 직후 인기가 있을 때 선거를 치르고 싶어 하는 자민당의 이기적 생존 논리였다. 이에 반해 이시바 후보가 민주주의 정론을 내세웠던 것에 필자도 감탄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시바 총리가 취임 직후 중의원을 해산하겠다고 밝혔고, 국회에서 각 당 대표 질의와 45분짜리 당수 토론만 한 다음 해산을 단행했다. 원래대로라면 이번 선거는 인구 감소와 일손 부족에 따른 경제 위축, 사회보장 재원 마련과 서비스 확보, 물가 상승과 임금 하락 등 국민 생활과 일본의 미래에 관한 중요한 정책 과제에 대해 각 당과 논쟁을 벌이고, 국민이 선택하도록 하는 기회가 돼야 했었다. 하지만 이시바 총리가 취임 뒤 겨우 1주일여 만에 중의원을 해산하면서, 정책 과제에 관한 여야 간 깊이 있는 논의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요컨대, 정론파라고 여겨졌던 이시바 총리도 새 정부의 인기가 높을 때 선거를 치르고 싶다는 자민당 다수 정치인의 이기주의를 따라간 것이다.



뒷돈을 챙긴 80명 넘는 의원들에 대해 국민이 엄중한 대응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시바 총리는 특별히 악질적인 12명을 공천하지 않는 데 그쳤다. 당 공천을 얻지 못한 정치인들뿐 아니라 선거에서 야당과 과반을 다투는 당 지도자에게 공천 후보가 줄어드는 것 역시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국민 눈으로 보면, ‘뒷돈 정치인’들이 평소처럼 출마한다는 건 너무 안일한 처분이다. 자민당은 2012년 12월 민주당으로부터 정권을 탈환한 뒤 각종 선거에서 연승을 거뒀다. 이후 아베 신조 정부 시절, 국유지 부정매각을 둘러싼 의혹과 공문서 조작 등 여러 권력형 범죄가 있었다. 하지만 유권자 절반 정도는 투표를 포기했고, 다른 많은 이들은 이런 부정부패를 잊으면서 자민당은 민의를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사실 2012년부터 2020년까지 이어진 2기 아베 신조 정부에서 권력의 사유화와 경제금융 정책의 난맥상 등 자민당 정치에는 여러가지 뒤틀린 것들이 누적돼왔다. 지각판에 뒤틀림이 쌓여 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지금 자민당은 아베식 정치에서 누적된 뒤틀림으로 대지진이 닥쳐오고 있다. 이번 선거 결과로 일본 정당 정치는 큰 재편에 들어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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