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개막한 '햄릿'에서 배우 조승우(가운데)가 햄릿 역을 맡아 첫 연극 무대에 도전했다. 사진 예술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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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것인가, 살 것인가. 내가 여기에 있다.”

영국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고전 『햄릿』명대사가 배우 조승우(44)의 입을 통해 이렇게 변주됐다. 지난 18일 서울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개막한 연극 ‘햄릿’(연출 신유청)은 그가 영화 ‘춘향뎐’(2000)으로 연기 데뷔한 지 24년 만에 첫 도전한 연극이다. “사느냐 죽느냐” 사색에 골몰한 우유부단한 기존의 햄릿에서 더 나아가 공감하고 행동하는 햄릿으로 재해석했다.

‘오페라의 유령’ ‘헤드윅’ ‘지킬 앤 하이드’ 등 뮤지컬 무대를 장악해온 조승우가 록스타 같은 매력으로 객석을 쥐락펴락한다. 25일 객석 1000여석을 가득 채운 관객은 숨 죽인 채 그의 연기를 지켜봤다. 울고 익살 부리고 드러눕고 바닥을 기는 등 온몸으로 노래하는 듯한 변화무쌍한 연기로 ‘공연시간 185분(인터미션 20분 포함)의 연기 차력쇼’란 평가를 얻었다.

다음 달 17일 폐막까지 매회 약 900석, 한 달 분 티켓이 예매 오픈 10분 만에 전석 매진되며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 연극 부문 월간 예매순위 1위에 올랐다. 레바논 내전 참상을 가족사에 담은 백상예술대상 백상연극상 수상작 ‘그을린 사랑’, 세기말 미국을 서울 무대로 옮긴 ‘엔젤스 인 아메리카’의 연출가 신유청이 연출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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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햄릿, 원로 총출동 잇는 '조승우 햄릿'

셰익스피어 4대 비극 '햄릿'(연출 신유청)이 내달 17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신유청 연출로 공연된다. 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숙부 클로디어스(앞줄 맨왼쪽, 박성근)는 형수 거트루드(정재은)를 왕비로 맞은 첫 연회 장면뿐 아니라, 매장면 의상에 흰색을 적극 활용했다. 홍문기 의상 디자이너에 따르면 "죄를 드러내지 않는 방패 같은 컬러"란 설명. 햄릿(맨오른쪽, 조승우)은 "폭풍 전야처럼"(홍문기) 컬러를 뺀 무채색 의상으로 일관했다. 사진 예술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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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여성 햄릿을 내세운 국립극단의 ‘햄릿’(연출 부새롬), 원로 배우가 대거 출연해 지난달 막을 내린 신시컴퍼니 ‘햄릿’(연출 손진책) 등 최근 ‘햄릿’ 공연이 잇따르고 있다. 이에 신 연출은 “햄릿은 언제나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며 “타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게 책임적 자아인데 요즘처럼 책임이란 단어가 엄중하게 다가온 적이 없다. 그렇기에 오늘날 수많은 햄릿이 공연되는 게 아닐까”라고 연출의 변에서 밝혔다.

무대는 토월극장의 깊이감을 최대치로 끌어냈다. 기울어진 기둥, 깎아지른 벽과 계단 등 거대한 지하감옥 같은 덴마크 왕궁에서 햄릿은 새로운 시대와 불화하는 구습적 왕국의 혼란상 그 자체가 됐다.

“진리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타자를 경유하는 방법 뿐”이란 신 연출의 해석이 도드라진다. 햄릿은 선왕인 아버지 유령(전국환)부터 형을 살해하고 왕위를 가로챈 숙부 클로디어스(박성근), 숙부와 결혼한 어머니 거트루드(정재은), 희생당한 순결 오필리어(이은조) 등을 마치 차례로 빙의하듯 공감한다.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라며 어머니에게 여성혐오를 드러내던 햄릿은 뒤늦게 아들의 정신병에 자책하는 거트루드의 비통에 공명하며, 역대 어떤 햄릿보다 더 애절하게 어머니를 부둥켜안는다. 클로디어스가 죄의식에 시달리면서도 욕망을 거두지 못하는 기도 장면에서 햄릿은 그와 똑같은 옷차림으로 클로디어스의 등 뒤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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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는 지적도

연극 '햄릿'(연출 신유청)에서 기도 중인 아버지의 원수 숙부에게 다가가는 햄릿은 비슷한 의상 때문에 숙부와 겹쳐져 보이기도 한다. 사진 예술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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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극에서 햄릿의 고뇌에 따른 희생양으로 그려져 온 오필리어 캐릭터마저 자멸하고 만 햄릿 마음속의 순수처럼 다가올 정도다. 주변인들의 모습을 제 것처럼 흡수하고 반영하는 점도 조승우 표 햄릿의 특징이다. 선왕의 살해 과정을 재현한 극중 연극의 비중도 커졌다. 햄릿이 극 중 극의 연출자 역할에 적극 나선다.

주제는 선명해졌지만, 다른 캐릭터들이 약화한 측면은 있다. “‘햄릿’에서 풀리지 않던 의구심들이 설명됐다” “수많은 '햄릿'을 봤지만 처음 눈물을 흘렸다”는 호평과 “조승우 배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아 아쉽다”(이상 인터파크 예매관객 관람평) 등 평가가 다소 엇갈리는 이유다.

이번 '햄릿'에서 햄릿(조승우, 왼쪽)은 "비텐베르크로 돌아가지 마라"고 강조하는 어머니(안겨있는 인물) 등 구시대와 새로운 시대 사이에 갈등하는 인물로도 그려진다. 사진 예술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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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 왕권 시대 인간의 존재론적 고민에서 나아가 신구 세대 대결도 한층 선명하게 그렸다. 원작에서 거트루드가 햄릿에게 “비텐베르크로 돌아가지 마라”고 세 번 반복한 대사가 신 연출에게 힌트가 됐다고 한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시작점을 알린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곳이 비텐베르크 대학 교회였다.

새로운 시대를 보고 돌아온 햄릿은 자신을 비텐베르크로 보낸 아버지의 서거 후 연회와 축포에 취한 왕가의 후퇴와 모순을 비추며 깨진 거울처럼 산산이 조각난다. "‘햄릿’은 동시대성‧시의성이 꿈틀거리는 작품"이라는 신 연출은 쉽게 푼 구어체의 반복적 대사로 “관습과 구질서의 틀 속에서 한걸음 진보하려는 몸짓과 노력”을 햄릿에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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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2막 도약시기" 조승우 언론 인터뷰 일체 거절

첫 연극 '햄릿'에서 조승우는 광기부터 어수룩한 익살까지 천의 얼굴을 오간다. 사진 예술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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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연극 '햄릿'에서 조승우는 광기부터 어수룩한 익살까지 천의 얼굴을 오간다. 사진 예술의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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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치밀하고 용맹한 왕자 포틴브라스(송서유)가 덴마크의 운명을 넘겨받는 결말도 햄릿이 포틴브라스를 이상적 리더로 인정하는 대사를 통해, 마치 그가 바랐던 운명처럼 다가온다. 덴마크의 자멸 속에 적국 노르웨이에 국운이 넘어갔던 여타 ‘햄릿’의 묘사와 차별화한 지점이다. 셰익스피어가 원작을 집필한 계기도 엘리자베스 1세의 후계자가 불안정하던 시기, 행동하는 이상적 왕위상을 지지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유일하게 감성과 이성이 균형 잡힌 친구 호레이쇼(김영민)가 후대에 햄릿의 속내를 전한다.

이처럼 과감한 재해석을 관객들에게 감정적으로 설득시키는 건 조승우의 열연이다. 무대 가장자리까지 다가와 갈팡질팡하는 고뇌를 고백하듯 되뇌며 관객을 햄릿 편으로 끌어들인다. 무대에서 가까운 1층 4~5열 좌석에서도 조승우의 세밀한 표정 변화까지 놓치지 않으려, 오페라글라스를 든 관객이 적지 않았다. 지난해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에 첫 출연하며 “배우로서 2막을 향해 도약해야만 하는 시기”라는 짧은 출연 소감만 밝힌 조승우는 연극으로 보폭을 넓힌 이번에도 언론 인터뷰 등은 일체 거절하고 연기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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