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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8 (월)

[특파원 칼럼/조은아]푸틴의 가장 큰 고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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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조은아 파리 특파원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인 러시아에서 최근 전쟁 소식에 가려졌던 기이한 뉴스가 있었다. 러시아에서 인터넷, 영화, 광고나 미디어를 통해 ‘자녀 없는 삶’을 옹호하면 벌금 최대 500만 루블(약 7150만 원)을 내야 한다는 내용이다. 러시아 하원의 뱌체슬라프 볼로딘 의장은 지난달 이런 법안을 검토한다고 발표했다. 서구 언론들은 말도 안 되는 코미디란 반응이었지만 러시아는 진지하다. 하원은 이 법안을 ‘국가 안보 전략’의 일부라고 불렀다.

하원은 올 상반기(1∼6월) 출산율이 25년 만에 최저치로 발표된 지 보름도 안 돼 이 법안을 공개했다. 특히 6월 신생아 수는 통계가 집계된 이후 처음으로 10만 명 이하로 떨어졌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입’인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이 소식을 듣고 “국가 미래에 치명적”이라고 개탄했다.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벌이는 푸틴 대통령은 ‘저출산’이란 강적과도 치열한 전투 중이다. 북한으로부터 ‘병력 수혈’을 받으면서 러시아의 고질적인 인력 부족의 심각성이 더욱 여실히 드러났다.


러 출산율, 佛-獨에 못 미쳐


2022년 2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뒤 많은 이들이 죽었고 전쟁에 반대하는 청년들이 떠난 영향이 당장은 클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저출산은 오래도록 뿌리 깊게 이어진 문제다. 정부는 전쟁 전부터 저소득 가정을 위한 유급 보육 서비스 확대, 대가족을 위한 세금 감면, 보육 시설 증설 등 다양한 저출산 대책을 도입했다.

푸틴식 중앙집권적 정책에도 저출산 문제는 좀처럼 정복되질 않았다. 푸틴 대통령이 수차례 ‘애를 낳아야 한다’고 열변하고 다녀도 소용이 없었다. 급기야 ‘여성 1명이 최소 3명은 낳아야 한다’는 목표까지 내걸었다. 지난달 보건부 장관이 ‘근무 중 휴식시간에 임신을 시도하라’는 취지의 발언까지 했다고 한다.

푸틴 대통령은 자국의 출산율만 신경 쓰는 게 아니다. 러시아 주변을 포위하려 애쓰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들의 출산율에도 민감하다. 나토 병력 수에 밀리면 지도상에서 지워질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유럽 통계기관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2022년 기준 러시아의 합계출산율(1.42명)은 나토 회원국 평균치에 가깝지만 프랑스(1.79명), 독일(1.46명), 벨기에(1.53명) 등에 못 미친다.

나토 회원국들도 병력 보강을 서두르고 있다. 독일 국방장관은 외국인 입대 허용 방안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영국 역시 2010년 이후 매년 신병 모집 목표 달성에 실패하고 있다. 육군 참모총장이 나서 시민군을 동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출산율 꼴찌’ 韓, 병력 확충 고민해야


사실 러시아나 나토 회원국들보다 저출산과 병력 충원을 더 심각하게 논의할 곳은 한국이다. 합계출산율(2022년 0.78명)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꼴찌’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은 엄연히 북한과 휴전 상태다.

그럼에도 독일이나 영국처럼 군 고위층에서 적극적으로 대책을 제안한다는 말은 잘 들리질 않는다. 징병제 개편은 민감한 문제이긴 하다. 그렇다면 직업군인을 늘릴 방안부터 논의해 볼 수 있다. 채용 박람회나 콘서트장까지 찾아가 상담 부스를 여는 독일군을 눈여겨볼 법하다. 독일 국방부는 입대 체험 무료 캠프를 확대하고, 지역별 거점에서 밀착 상담을 진행해 직업적 호감도를 높이고 있다.

원래 이런 대책은 긴 호흡으로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으로 국제 정세가 요동치며 경험해 보지 못한 시간이 오고 있다. 장기적으로 내다보되 좀 더 빠른 호흡으로 서둘러야 할 때가 됐다.

조은아 파리 특파원 ac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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