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즉석휘호 작업을 하고 있는 배렴과 김은호 작가의 모습. 황정연 교수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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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년 전 사진 속에 당시 ‘국부’로 떠받들어졌던 83살의 대통령 이승만과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린 당대 서화의 대가들이 있었다. 이승만이 흐뭇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대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실연 현장도 펼쳐졌다. 춘곡 고희동, 이당 김은호, 제당 배렴, 운곡 김기승, 1950~60년대 한국 미술계를 움직였던 큰 어른이자 실세들이었다.
이 사진들은 1958년 6월25일 서울 퇴계로 필동 한국의 집 신축 개관 기념 서화휘호회에서 벌어진 장면을 담은 것이다. 당시 대통령 직속 공보실장 오재경은 필동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관저를 헐고 1년간 개축공사를 벌여 전날 새 한옥 건물로 한국의 집 개관식을 치른 터였다. 다음날 대통령이 방문한다는 전갈을 받고 작가들을 다시 불러들여 대통령 앞에서 솜씨를 즉석 실연하게 한 것이다. 전날 개관식에서 당대 한국화 양대 거두였던 청전 이상범, 소정 변관식과 막 도불 유학을 준비 중이던 고암 이응노 등이 일필휘지로 작업하는 장면이 담긴 사진들도 나왔다.
1958년 6월25일 한국의 집에서 열린 서화휘호회 현장에서 작가들을 만나는 이승만 대통령. 황정연 교수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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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연구자인 황정연 한국학중앙연구원 조교수는 지난 26일 ‘미술작품이 상품이 될 때: 한국 현대 미술시장의 역사와 현재’라는 주제로 열린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가을 학술대회(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지난 60여년간 묻혔던 한국의 집 서화휘호회 사진 20여장을 내보여 눈길을 모았다. 황 교수는 ‘1950년대 후반 국가와 미술시장: 공보실의 한국의 집 운영과 서화휘호회 개최를 중심으로’란 제목의 논고를 발표하며 전쟁의 상흔이 회복되지 않아 예술품을 선보일 상설 시설이 부족했던 1950년대 중반 국가가 문화 시책의 하나로 작품의 유통 감상 과정에 적극 개입했다면서 국가기록원 수장고를 뒤져 찾은 사진들을 근거로 예시했다. 공보실이 전통 문화예술을 미국 등 우방국의 외국인들과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한국의 집과 중앙공보관, 원각사 등 전시 공연 시설을 신설해 작가들을 동원하면서 감상은 물론 이후 판매유통까지 입김을 미쳤다는 게 논고의 요지다.
서화휘호회는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 미술품을 대중에게 보여주고 유통하는 장으로 종종 활용됐으나, 한국의 집 재개관 서화휘호회는 당대 권력자와 정부기관, 유력 서화가들의 밀착된 관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닌다고 했다. 작가의 명망과 위상을 높여주고, 향후 정부 쪽 공공 미술사업 참여로 이어지는 등 열악한 당시 유통시장 여건에서 작업 지속성을 보장하고 확대시켜주는 순기능도 갖고 있었다는 분석이다. 서화휘호회 작품들은 한국의 집에 기증돼 일부 전시됐으나, 1980년 국립미술관으로 이관된 뒤엔 거의 공개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1958년 6월 한국의 집에서 열린 서화휘호회의 한 장면. 왼쪽에서 그리는 인물이 소정 변관식이고 오른쪽 붓을 든 인물이 당시 도불을 준비하던 이응노다. 황정연 교수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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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 학술행사로는 처음 시장이 미술사에 미친 영향 관계를 논의한 이날 자리에서는 1970년 창업해 국내 상업화랑 효시가 된 현대화랑과 1980년대 미술품 판매 대중화를 주도한 가나화랑의 공과를 각각 살펴본 조수진·서유리 연구자의 논고에도 시선이 쏠렸다. 조 연구자는 1970~80년대 현대화랑 창업주 박명자 회장을 비롯한 여성 화상들과 여성 유한층 컬렉터들이 한국화 일색인 시장 흐름을 서양화와 단색조회화 등으로 바꿨다면서 미술 시장의 여성들이 한국 현대미술사에 미친 주도적 영향을 강조하는 논쟁적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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