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정동현의 pick] 깐풍기
신사동에 새롭게 문을 연 중국집에서 식사를 하며 그 옛날 아버지가 쓰던 ‘학생부군신위’라는 문장이 떠올랐다. 눈이 동그랗고 체격이 좋은 주인장은 음식을 내놓을 때마다 ‘아직 배움이 부족하다’는 말을 후렴구처럼 덧붙였다. 음식을 먹을 때 ‘맛’이 아니라 ‘배움’에 대해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 집의 이름은 ‘청담 산해관’이다.
왕복 10차선 도산대로 위 자동차의 커다란 엔진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음은 마치 사막에서 홀로 소리치는 광인(狂人)처럼 기괴하고 쓸쓸했다. 아마 요즘 유난히 한가해진 서울의 밤거리 때문인 듯싶었다. 조금만 더 걸어 나가면 압구정역이 있었고 그 뒷골목 한편에 ‘청담 산해관’이 있었다. 이 집 주인장은 같은 이름으로 경희대 근처에서 장사를 하다 건강 문제로 2년 정도 쉬었다고 했다. 주인장의 안부를 물으며 강북에서 강남까지 단골들이 쫓아왔다는 말도 들었다.
시작은 팔보채였다. 어느 순간 중국집에 가서 해산물 요리를 시키지 않는다. 우선 오징어가 사라졌고 싼 냉동 해산물이 자리를 차지했다. 사람들이 중국 요리에는 값 치르기를 주저하니 어쩔 수 없이 질이 떨어졌다. 이 집 팔보채에는 가리비 관자, 전복, 해삼, 새우가 아낌없이 들어갔다. 어느 것 하나 맛이 빠져 맹탕이거나 혹은 잡내 나는 것이 없었다. 회로 먹어도 될 만한 재료를 볶음 요리에 쓰는 것 같았다. 재료를 씹을 때마다 생물 특유의 단맛이 느껴졌다. 전분물을 가득 부어 양을 늘리지도 않았다. 첫맛은 짭짤한 감칠맛이 돌다가 뒤로는 은근히 열기가 올라왔다.
서울 신사동 ‘청담 산해관’의 깐풍기.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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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나온 깐풍기는 전에 본 적 없는 모양새였다. 깐풍기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사천식 닭튀김인 ‘라즈지’에 다다른다. 닭을 잘게 잘라 바싹 튀겨 마른 고추와 사천후추를 잔뜩 넣고 마르게 볶는 이 요리가 사천의 산을 넘고 황해를 건넜으며 반백 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산둥반도 화교의 손에서 지금의 깐풍기가 되었다는 것이 유력한 가설이다. 마르게 볶아낸 라즈지는 단맛 하나 없이 맹렬하지만 지속력이 짧은 매운맛이다. 그에 반해 한국의 깐풍기는 단맛과 신맛, 매운맛을 고루 품어 둥글둥글해졌다.
이 집의 깐풍기는 또 달랐다. 우선 닭다리살을 폭신하게 튀겼다. 싱가포르에서 머드크랩을 먹을 때 맛본 블랙페퍼 소스처럼 마늘과 후추를 써서 또 다른 종류의 매콤한 맛을 만들어냈다. 주방에서 갓 나온 튀김은 그 자체로도 충분했다. 전분을 쓴 튀김옷은 폭신하면서도 쫄깃했다. 닭다리살은 기름과 살코기가 적당히 섞여 씹을 때마다 흐르는 육즙에 입을 닦아야 했다. 매캐한 매운맛은 고추에서 비롯된 것보다 깔끔하고 간결했다.
청담 산해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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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뽑은 닭육수를 써서 볶아낸 짬뽕은 잡티 하나도 끼지 않은 선명한 붉은색을 하고 있었다. 옛 식으로 곱게 볶아 지금 유행하듯 탄내가 나지 않았다. 면은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웠다. 국물은 매콤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부드럽고 밀도가 높아 한 방울 남기는 것조차 아까웠다. 이 집의 음식은 이렇듯 대체로 모순된 맛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강하면서도 부드럽고 화려하지만 정돈된 맛이 차분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접시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 맛처럼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주방에서 나온 주인장의 양팔은 상처와 화상이 빽빽했다. 경주 출신이라는 그는 귀에 익은 사투리를 쓰면서 ‘여전히 배우는 중’이라고 했다.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과 매일의 작은 좌절, 그 과정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기에 필연적으로 배움은 외롭다. 그 속에서 나온 음식은 마치 스스로 숨을 쉬고 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했다. 그 뒤에는 무너져 내리는 돌덩이를 막고 선 거인처럼, 불과 기름 앞에서 매일을 견디는 한 남자가 있었다.
#청담 산해관: 깐풍기 4만8000원, 해물짬뽕 1만9000원
[정동현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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