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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 (토)

귀와 눈과 코가 즐거운 가을 궁궐 숲 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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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서울, 이곳종로구 창경궁

한겨레

명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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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늘 짧았지만 여름이 워낙 길어선지 이러다 가을이 지나가 버릴까봐 올해는 유난히 더 조바심이 난다. 작정하고 먼 데 여행은 못 가더라도 시간 날 때 잠깐 짬을 내 선선한 이 계절을 담아두고 싶어 비가 오는데도 무리해서 우산을 들고 143번 버스를 탔다. 강남부터 정릉까지 가는 동안 남산도 지나고 명동도 지나고 종로도 지나면 내게는 이 버스가 영락없이 서울 시내 관광버스다.

대학에 와서야 서울 사람이 된 나에게 서울은 눈 감으면 코 베어갈 것만 같은 위협적인 도시였지만, 그 와중에도 차창 너머로 빌딩 숲과 궁궐의 오묘한 조화를 감상할 수 있는 이 노선이 나는 참 좋았다.

여러 궁궐 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궁은 창경궁이다. 창경궁은 서울의 5개 궁궐 중 가장 친자연적인 곳으로 꼽힌다. 울창한 나무와 고즈넉한 분위기가 좋아 버스로 여기를 지날 때마다 내릴까 말까 망설이는 사람이 설마 나뿐일까 싶다. 마치 타임 슬립이 일어난 것처럼 도시의 꽉 막힌 도로와 시끄러운 음향이 이곳에선 일순간 정지 상태가 되고, 궁 안엔 그윽한 고요가 맴돈다.

밤바람이 좀 차긴 하지만 시간이 된다면 어둠이 내리고 조명이 켜질 때까지 기다려 밤의 궁궐을 감상해보길 추천한다. 낮과는 또 다른, 완벽히 도심과 단절된 공간감이 꽤 특별하다. 창경궁은 그 위치가 창덕궁과 종묘, 성균관으로 둘러싸였고 빌딩이라곤 길 건너 서울대병원뿐이어서 도심 불빛이 새어들지 않아 비현실적으로 깜깜하다. 이토록 깜깜한 공간이 잠들지 않는 도시 서울안에 존재한다는 게 신기하다. 내 눈이 그동안 얼마나 빛 공해에 시달려왔는지 어둠 속에서 눈이 정화된다.

내심 단풍 든 궁궐의 가을을 기대하고 왔는데 긴 여름 끝에 나무도 지쳤는지 아직 가을색을 올리지 못했고, 대신 어제 내린 가을비가 흙 속에 남아 나무 냄새, 이끼 냄새가 평소보다 더 진하다. 궁궐 숲은 이렇게 고요와 어둠과 냄새만으로도 나의 귀와 눈과 코에 쉼을 준다.

창경원을 기억하는 세대에게 이곳은 어린시절 추억이 떠오르는 공간이기도 하다. 나도 한 번은 가족과 함께, 또 한 번은 초등학교 소풍으로 이곳을 다녀갔다는 증거가 어디 잘 찾으면 한 장쯤은 나올 텐데 아쉽게도 항상 찾으면 없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 시절 창경원은 사람도 너무 많았고 시끌시끌한 유원지 같은 느낌이었다. 딱히 갈 곳 없던 당시 서울에서 시민들이 휴일을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원 중 하나로 기능했다고 하니, 일제는 궁의 전각들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지어 넣는 방식으로 조선왕조 500년을 짓밟아버린 것이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으로 들어와 정면에 보이는 돌다리 옥천교를 건너면 명정문이 나오고, 감히 왕의 길 어도를 걸어 명정전으로 향한다. 원래는 성종 때 처음 지었지만 임진왜란과 순조 30년 대화재를 겪으며 소실되고 재건하기를 반복해 현재는 광해군 때 재건한 이 두 건물이 창경궁 전체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고 한다. 그 밖에도 사도세자의 참극이 있었던 문정전, 정조가 태어난 경춘전, 또 함양문을 넘어가면 창덕궁으로도 이어지니 전각마다 사연이 깊고 발길 닿는 곳마다 묵직한 이야깃거리가 풍성해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궁궐을 한바퀴 돌고 나면 졸업하면서 다 잊은 줄 알았던 역사의 장면들이 새록새록 살아난다.

역사 공불랑 넣어두더라도 이 좋은 계절 그저 느린 걸음만으로도 궁궐 숲이 주는 즐거움이 크다. 특히 창경궁 안에 있는 두 개의 연못 춘당지는 가을 단풍으로 유명하다. 나는 못 봤지만 천연기념물인 원앙도 볼 수 있다 하니 자세히 살펴보자. 춘당지 앞에 있는 대온실은 하얀 철제와 목재, 유리로 지어진 이색적인 외관이 멀리서도 단연코 눈에 띈다. 어림잡아 한국 사람보다 족히 많아 보이는 외국 관광객들은 드라마에서 보았던 궁궐의 실물을 휴대전화에 최대한 많이 담아두려 욕심을 낸다. 하긴 우리도 유럽에 여행을 가면 베르사유니, 알람브라니 궁궐 투어를 빼놓지 않는 것처럼 그들도 이곳을 찾았을 것이다. 뜬금없지만 유럽 궁전들에 비하면 창경궁 입장료는 너무 싸다.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1천원이고 그나마도 한복을 입으면 무료 입장이 가능하니 관광하기에 우리나라만큼 좋은 나라는 없는 것 같다. 참고로 요즘은 입장권 대신 교통카드를 찍고 입장할 수도 있어 무척 간편해졌다.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운영하며 월요일은 정기휴무다. 다음주에 가면 단풍이 좀 들었으려나.

글·사진 강현정 작가(전 방송인) sabbuni@naver.com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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