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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 (화)

[인터뷰] 22개국 사업장서 100% 재생에너지 쓰는 엡손… 후지사키 사업부장 “미래 세대 위한 선제적 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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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프린터·프로젝터 선두 기업 세이코 엡손(이하 엡손)은 일본 제조 기업 최초로, 지난해 말 전 세계 22개국 총 82개 사업장에서 사용하는 전력을 100% 재생에너지로 전환했다. 엡손이 작년 일본과 해외에서 사용한 전력량은 총 872기가와트시(GWh). 25만 가구가 1년 동안 사용할 전력량을 재생에너지로 조달한 셈이다. 국내엔 아직 100% 재생에너지로 전환한 기업이 없다. 2017년까지만 해도 재생에너지 비중이 1%에 불과했던 엡손은 어떻게 ‘RE100′(100% 재생에너지 사용 목표)을 선언한 지 3년이 채 안 돼 이를 달성했을까.

엡손에서 ESG(환경·사회·지배구조)와 IR 사업 등을 이끌고 있는 후지사키 코지로 사업부장은 지난 1일 조선비즈와 만나 “미래 세대를 위해 환경을 개선하려는 선제적인 투자가 꼭 필요하다고 봐 8년 전부터 재생에너지 전환을 준비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시엔 일본에서도 재생에너지에 대한 이해가 낮아 사내외에 전환 필요성을 설득하는 데 시간을 많이 들였다”며 “시행착오도 셀 수 없다”고 했다. 일본은 재생에너지 전환이 더딘 국가 중 하나다. 일본의 전력 생산 중 화석연료가 차지하는 비중은 2022년 기준 71%로 유럽연합(38%)의 2배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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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사키 코지로 세이코 엡손 사업부장./그래픽=정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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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용도 만만치 않다. 엡손이 재생에너지를 사용하는 데 드는 비용은 연간 10억엔(약 94조원) 이상이다. 이렇다 보니 엡손 내부에서도 전 세계 사업장의 전력을 모두 재생에너지로 대체할 수 있다고 본 직원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엡손이 수년 만에 재생에너지 비중을 100%로 끌어 올리는 데엔 80년 전 창립 초기부터 이어져 온 환경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 기반이 됐다. 엡손은 1988년, 제조 공정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던 프레온을 퇴출하기로 결정하고 5년 만에 프레온 배출을 ‘제로(0)’로 만든 전례가 있다. 후지사키 사업부장은 “창업자부터 지역과의 상생을 절대적 사명으로 지켜왔다”며 “이런 탄탄한 주춧돌이 없었다면, 우리가 왜 지금 당장 비싼 재생에너지를 써야 하는지 전 세계 직원들을 설득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엡손의 재생에너지 투자 원칙은 ‘현지 조달’이다. 일본에서는 당장 전력회사를 설득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2016년 당시 엡손의 온실가스 배출량의 70%가 화석연료 기반 전력에서 나왔는데, 이를 대체하기까지는 첩첩산중이었다. 후지사키 사업부장은 “엡손처럼 큰 기업이 재생에너지로 100% 전환한 사례가 없어, 전력사에 문의해도 재생에너지 판매 매뉴얼조차 마련돼 있지 않았다”며 “재생에너지 발전사와 전력 수급 계약을 맺기까지 대화와 설득에 2년이 걸렸다”고 했다. 해외에서는 각 지역 특성에 맞춰 풍력, 수력, 바이오매스(생물 연료) 등 다양한 재생에너지를 활용했다. 후지사키 부장은 “장기적으로는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해 외부 조달 비율을 낮추는 게 과제”라고 말했다. 엡손은 2023 회계연도에 매출 1조3100억엔(약 11조9100억원), 순이익 526억엔(약 4780억원)을 기록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RE100을 위해 수익을 담보할 수 없는 비용이 투입되는데 주주들 반발은 없었나.

“단기적으로 사업이나 수익성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화석연료를 많이 사용해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기존 제조 방식은 앞으론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판단이 컸다. 이에 4년 전 2050년까지 ‘탄소 네거티브’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탄소 네거티브는 이산화탄소 순배출량을 제로로 만드는 탄소 중립에서 한발 더 나아가 제품을 제조하면서 오히려 탄소를 줄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우선 2030년까지 환경 관련 사업에 1000억엔(약 9000억원)을 투자하기로 하고, 주주들에도 이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했다. 우리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의 모습은 무엇인지, 그 속에서 제조업이 담당해야 할 역할은 무엇인지 설명하고 장기적인 목표를 설정한 것이다. RE100은 그 첫 걸음이다. 일본 주주들은 회사의 가치를 장기적으로 바라보는 편이다. 환경 투자로 당장 수익성이 일부 떨어져도, 중장기 전략에 따라 실적도 목표에 맞게 가고 있다고 설득했으며 주주들의 지지와 이해를 얻고 있다.”

—각국 사업장마다 현지에 맞는 재생에너지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나.

“엡손 본사가 있는 일본 나가노현은 물이 풍부해 수력 발전으로 전력을 공급받고, 대규모 생산 거점인 인도네시아에서는 현지에 풍부한 야자수 껍질을 연료로 사용해 전기를 얻는다. 또한 필리핀과 태국, 베트남 등에선 지열 발전과 태양광 발전을 주로 활용하고 있다. 핵심은 각 사업장이 최적의 재생에너지를 선택해 전환을 주도할 수 있게 한 점이다.

한국이나 대만처럼 재생에너지 공급이 한정적인 곳에선 ‘재생에너지 공급인증서(REC)’ 제도를 활용해 전력 사용량에 해당하는 인증서를 전량 구매한다. 한국의 경우, 2022년 10월부터 3개월마다 시장 동향을 살피며 사용한 전력량만큼 REC로 구매하고 있다.”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는 자신이 생산한 재생에너지량만큼 공급인증서를 정부로부터 발급 받는데, 엡손 같은 기업이 이 인증서를 구매하면 그 구매량만큼 재생에너지를 사용한 것으로 인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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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정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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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조달이 어려운 경우 어떻게 대응했나.

“예를 들어 싱가포르에서는 재생에너지를 공공기관, 관공서, 학교에 우선 공급되기 떄문에, 엡손같은 대규모 외국 기업이 현지에서 재생에너지 전력이나 인증서를 구매하기 어렵다. 이에 태양광 발전을 자체적으로 설치해 전력을 공급받았고, 싱가포르 인근 아세안 국가에 있는 재생에너지 발전회사로부터 공급인증서를 구매하는 방식을 활용하고 있다.”

—유지 비용만 매년 10억엔 이상이 드는데 지속 가능하다고 보나.

“장기적으로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와 고정 가격으로 공급 계약을 맺으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가령 20년 이상 재생에너지를 지속적으로 공급받으면 투자금 회수가 가능한 수준이다. 현재는 일본 나가노현에 있는 전력회사로부터는 투자를 받고 있기도 하다. 물론 과제도 많다. 전 세계 많은 기업이 RE100을 목표로 하고 있어, 재생에너지와 재생에너지 인증서 구매 경쟁이 심화될 것이다. 따라서 자가발전용 태양광 패널 설치를 늘리는 데에서 나아가 바이오매스 발전소를 지어 외부 조달을 줄여 나가려고 한다. 버려진 목재나 폐기물로 간주되는 나무 껍질과 버섯배지(培地)를 연료로 사용해 2026년부터 연간 1400만kWh(킬로와트시) 규모의 전력을 자체 조달할 계획이다.”

최지희 기자(hee@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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