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더 드레서>의 한 장면 ⓒ국립정동극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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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지나는 시간 앞에 즐길 공연은 많다
“Ars Longa, Vita Brevis(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고대 그리스 의학자 히포크라테스의 말이다. ‘Ars’를 ‘Art’로 해석한 것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여전히 반짝하고 머릿속의 파란 신호등이 켜지는 문구임에는 틀림없다.
2024년을 두 달 남짓 남겨놓은 지금, 바야흐로 흐르는 시간 앞에 즐겨야 할 작품은 많다. 연말이 가까워지는 4분기는 대한민국 곳곳에 영화제와 지역축제, 오페라, 유수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 가족극, 뮤지컬, 발레 등 다양한 문화예술계 공연들이 쏟아진다.
11월의 장르별 주요 공연은 <보컬 마스터시리즈III-베이스바리톤 사무엘윤>(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11/16), <햄릿>(CJ토월극장, 10/18~11/17), 한국인이 사랑하는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 피아노 리사이틀>(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1/20), 유니버설발레단의 <호두까기인형>이 대구(11.15~16)와 대전(11/22~23), 성남(11/29~30)에서, 국악의 새로운 지평을 선도하는 국립창극단의 <이날치전>(국립극장 달오름극장, 11/14~21) 등을 꼽을 수 있다.
<더 드레서>에서 선생님 역을 맡은 송승환 ⓒ국립정동극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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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더 드레서>에서 송승환의 ‘선생님’을 만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연말에만 공연을 본다.” 언젠가 유독 연말에만 매진 행진이 이어지는 경향에 대해 제작자이자 배우인 송승환의 즐거운 불평을 들은 적이 있다.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 넌버벌 퍼포먼스 <난타>(1997년 10월 초연)의 제작자,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으로 메가이벤트를 성공리에 마친 입지 전적 인물. 배우 송승환은 1965년 KBS 아역 성우로 데뷔해 올해로 연기 생활 59년째를 맞았다.
“누군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서 삶의 이유를 찾은 거예요. 그 사람들 전부가 선생님의 연기를 원하고 있다고요.”
현재 그가 ‘선생님’ 역을 맡아 국립정동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더 드레서>의 1막에서 공연 전 불안해하는 선생님을 위로하는 의상 담당자인 노먼의 대사다. 송승환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발병한 망막색소 변성증으로 시각장애 4급 판정을 받았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사람들의 발이 꽁꽁 묶였을 때 <원더풀 라이프>라는 원로 예술인들의 인생 이야기를 풀어내는 유튜브 방송을 시작해 현재 27만6000명의 구독자를 가지고 있다. 어쩐지 노쇠하고 변덕스러운 극 중 선생님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행보다.
“선생님이라는 캐릭터가 저와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는 생각이 제일 많이 들었어요. 저도 어려서부터 배우를 했던 사람이라 늙어가면서 배우가 느끼는 여러 가지 후회와 자긍심 같은 걸 잘 알고 있으니까요. 제가 PMC프로덕션 대표로 지낸 지도 올해로 28년째인데 극 중 선생님도 극단 대표잖아요. 극단 대표는 배우와 달리 경영자로서 느끼는 많은 어려움이 있죠. 그런 것들이 제가 몰입하기에 굉장히 좋았어요. 드라마, 영화, 연극 다 합치면 100편이 넘는 작품을 한 것 같은데, 배우로서 배우 역할을 한 적은 없더라고요. 그래서인지 대사를 읽으면 바로 몰입이 돼요.”
송승환의 홀인원 기념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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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환에게 연기는 삶 자체, 시력 저하에도 골프 놓지 않아
<더 드레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셰익스피어 전문극단을 배경으로 평생 리어왕 역할을 맡아온 쇠약한 노배우(선생님)와 그의 의상 담당자(노먼)와의 엇갈린 우정을 그린 이야기다. 스토리는 극중극 <리어왕>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리어왕>은 세상을 호령했지만 이제는 늙어버린 리어와 딸들의 관계를 다룬 희곡.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의 <햄릿>, <오셀로>, <맥베스>와 함께 4대 비극 중 하나로 죽음을 앞둔 리어의 다양한 소회를 그린 작품이다.
연극 <더 드레서>는 영화 <피아니스트>로 오스카상을 수상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작가 로널드 하우드의 희곡이 원작이다. 로널드 하우드가 셰익스피어 전문극단에서 5년간 의상 담당자로 일하면서 실제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완성됐다. <햄릿>, <맥베스>, <로미오와 줄리엣>, <리처드3세>, <베니스의 상인>, <오셀로> 등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카메오처럼 언급되어 재미를 더한다.
송승환은 말한다. “연기가 어릴 때부터 취미였지만 직업이되면서 그냥 삶이 됐어요. 저는 연기하는 게 계속 좋았어요. 늘 새로운 역할을 하기 때문에 다른 직업에 비해서 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지루함이나 매너리즘에 빠지는 게 덜해요. 아마 이게 배우라는 직업의 좋은 점이겠죠. 수십 년동안 연기라는 같은 일을 했지만, 어떻게 보면 늘 다른 일을 한 거예요.”
평창동계올림픽 후 오랜만의 라운드에서 시력 저하로 바로앞에 있는 공을 찾지 못하는 송승환을 만났었다. 시야 확보가 되는 길이로 퍼터를 잘랐다며 특허를 내야겠다고, 오히려 일관성이 생겨 홀인원을 했다며 유쾌하게 기념볼을 건네는 송승환을 바라보는 나는 어느새 <더 드레서> 안의 드레서인 노먼이 된 듯했다.
11월 3일까지 국립정동극장에서 상연하는 연극 <더 드레서>는 대구(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 11/28~30), 부산(부산시민회관 대극장, 12/6~7) 공연으로 주옥같은 명대사의 감동을 연말까지 이어간다.
이지희 국가유산디지털보존협회 부회장. 기획자, 프로듀서, 마케터 등으로 문화예술계 다방면에서 일했다. 베스트스코어 2 오버 기록을 가진 골프 마니아로 골프와 사랑에 빠진 예술인들의 활동과 에피소드를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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