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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 (화)

서가의 책을 버리는 법 [똑똑! 한국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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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안동섭 울산대 철학·상담학과 교수가 폐기 장서 중에서 구해낸 책들이 그의 연구실 탁자에 쌓여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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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철 |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출판인



어려서부터 아버지께 “책을 천하게 여기는 것은 아비를 천하게 여기는 것”이란 말씀을 듣고 자랐다. 자라면서는 집안 형편이 넉넉지 않아 주로 헌책방을 드나들었지만, 낡은 책도 소중히 여겼다. 한창 돈을 벌 때는 책과 음반을 마음껏 살 수 있다는 것이 가장 기뻤다. 그러다 전자책이 나왔다. 신세계였다. 쌓여만 가는 책을 기증하거나 폐기하지 않아도 되고, 휴대폰만 있으면 수천권의 장서를 고스란히 갖고 다닐 수 있었다. 그래도 캐나다 이민 올 때 수백권의 종이책을 가지고 왔다. 짐을 줄여야 했지만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책이 너무 많았다.



이민 생활은 힘들었다. 도서관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수많은 책 사이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그곳에서 글을 쓰고, 책을 번역하고, 음악을 들었다. “천국이 있다면 도서관 같을 것”이라는 보르헤스의 말을 늘 떠올렸다. 자연스럽게 도서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울산대학교에서 중앙도서관 장서 27만권을 폐기했다. 도서관을 현대화하기 위해 45만권을 폐기한다는 소식이 전해진 지 1년 만이다. 그나마 교수와 학생들이 눈물 겨운 노력을 기울여 상당한 책을 ‘구출’한 결과다. 구원받지 못한 책들은 파쇄되어 상품 포장지가 되었다. 평생 책을 사랑해온 사람으로서 서운하기 그지없으나, 꼭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니다.



책을 폐기하는 것은 건강한 도서관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지식은 계속 늘어나고, 이를 반영해 끊임없이 새로운 책이 나오기 때문이다. 도서관의 예산과 공간이 무한하다면 모를까, 파손된 책이나 낡은 정보를 담은 책을 서가에서 치우지 않는다면 더 훌륭한 책을 놓을 공간이 없을 것이다. 책을 관리하는 데도 비용이 든다. 연간 권당 1천~5천원 수준이다. 그 비용을 들이는데 10년간 아무도 대출하지 않는 책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이 문제야말로 누구보다 책을 사랑하는 도서관 사서들의 오랜 고민거리다.



북미의 도서관은 두가지 방법을 쓴다. 우선 책을 사들일 때 신중을 기한다. 도서관들이 연합해 장서를 느슨하게 공유하기도 한다. 내가 사는 브리티시컬럼비아주는 면적이 남한의 9.5배인데, 주내 어느 도서관에 있는 책도 우리 동네에서 빌릴 수 있고, 그 책을 주내 어느 도서관에 반납해도 된다. 물론 대출 신청을 했을 때 책을 가져오는 비용이 더 들면 아예 새 책을 사준다.



또 하나는 시민이 참여하는 단체를 구성해 도서관 운영에 지역 주민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것이다. 책의 폐기도 이들이 맡는다. 어느 도서관에 가도 폐기 도서, 시디(CD), 디브이디(DVD)를 파는 매대가 있다. 우리 돈으로 권당 200원에서 2천원 정도다. 시민들도 안 보는 책이 있으면 그냥 매대에 갖다 둔다. 그리고 분기에 한번 폐기 도서를 시민에게 파는 대규모 세일 행사를 연다. 지역 축제와 맞물려 밴드 공연을 듣고, 맥주를 마시면서 책을 고르는 호사를 누린다. 200원 받아서 뭘 하느냐고 물었더니, 아예 안 받으면 책을 그냥 버릴까 봐 그렇다고 했다. 소중한 책이 수명을 다할 때까지 읽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요점은 뭔가? 도서관의 장서는 모두의 세금으로 샀으니 폐기 과정 또한 누구도 소외시키지 말자는 것이다. 핵심은 투명성과 소통이다.



울산대 도서관 일도 그 점이 아쉽다. 10년 넘게 대출 없는 책을 폐기하거나, 디지털화하거나, 학생과 교직원에게 필요한 쪽으로 공간과 예산을 쓰는 것, 다 좋다. 도서관 당국도 고민했을 것이다. 대학도서관과 공립도서관의 차이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참여와 소통은? 미국 모 대학은 아예 웹사이트에 폐기 도서에 대한 정보를 게시해 교수와 직원과 학생들의 의견을 듣는다. 물론 시민에게도 열린 공간이다. 낡은 책 좀 버리는데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물론이다. 책은 문화와 정서와 향수를 담고 있다. 우리가 인간인 한 그것이 능률과 예산보다 덜 중요하다고 할 수 없다. 책은 특별하다. 아버지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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