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 선교사의 증손녀 쉴라 플랫(76). 임석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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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4월5일 미국인 3명이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북감리교가 파견한 아펜젤러(1858~1902) 부부와 북장로교 소속 언더우드(1859~1916) 선교사다. 마침 부활절이었던 이날은 한국 개신교가 실질적인 첫걸음을 내디딘 순간으로 기록된다. 미국 동부에서 출발해 샌프란시스코와 일본을 경유한 기나긴 여정이었다.
이 세 사람 가운데 가장 먼저 한국 땅을 밟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셋이 상의해 팔짱을 끼고 동시에 내리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레이디 퍼스트’잖아요. 모르긴 몰라도 할머니가 가장 먼저 내리는 게 좋은 해결책 아니었을까요.” 지난달 29일 미국 뉴저지주 매디슨시 소재 드류신학교에서 기자들을 만난 아펜젤러의 증손녀 쉴라 플랫(76)은 “농담으로 나눴던 이런 얘기들이 재미난 기억으로 남아있다”며 웃었다. 드류신학대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공부했던 학교. 아펜젤러 선교사 장남 헨리 도지 아펜젤러(1889~1953)의 막내딸이 플랫의 어머니다. 플랫은 “증조부가 돌아가셨을 때 할아버지가 12살에 불과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많지 않다”고 아쉬워했다.
미국 뉴저지 드류신학교에 있는 아펜젤러 흉상. 임석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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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근 희소식이 들렸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초기 한국 생활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편지 더미가 발견된 것. “지난 7월 와이오밍주의 사촌 농장 창고에서 증조부가 쓴 편지 더미와 글들을 찾았어요.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분량이 상당하다고 들었어요.” 플랫은 “증조부가 드류신학대학 동창에게 보낸 편지들이 많은데, 입국 초창기 한국 생활이 어떠했는지가 담겨있다고 한다”며 “편지를 읽은 사촌이 ‘증조부가 농담도 잘하시고 유머 감각이 뛰어나신 분 같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아펜젤러 선교사의 증손녀 쉴라 플랫은 “증조부가 한국 초창기 시절 미국 드류신학교 동창에게 보낸 편지들이 지난 7월 사촌의 와이오밍 농장에서 무더기로 발견됐다”고 전했다. 오른쪽부터 소강석 한국교회미래재단 이사장, 쉴라 플랫, 아폰데틴 드류신학교 학장. 임석규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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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 선교사는 군산 부근 해상에서 선박 사고로 44살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 때문인지 다른 초기 선교사들에 비해 자료가 많지 않은 편이다. 아펜젤러가 1886년 세운 배재학당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학생이었고, 독립신문을 만든 서재필이 교사로 섰던 최초의 서양 근대식 교육기관이다. 아펜젤러가 같은 해에 세운 국내 최초의 감리교회 정동제일교회도 지난해 역사기념관을 열었다.
한국기독교역사문화관 안교성 관장은 “아펜젤러 선교사 초기 자료라면 기독교뿐만 아니라 역사적 자료로도 가치가 높다”고 말했다. 플랫은 “내용 검토가 끝나고 적절한 시점이 오면 이 편지들을 기증할 것 같다”고 했다. 드류신학대를 나와 뉴저지에서 목회 중인 안성천 목사는 “아펜젤러와 관련 있는 국내 여러 단체가 관심을 보인다”고 말했다. 앞서 2022년엔 아펜젤러가 고종에게 하사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나전흑칠삼층장’을 후손들이 배재학당역사박물관에 기증한 바 있다.
“증조부는 선교사의 사명에 깊이 헌신하신 분입니다. 처음 1~2년은 언어도 모르고 문화도 낯설어 어려움을 겪었는데, 곧바로 한영사전 작업을 시작하셨어요. 마침내 한국 사람들을 깊이 사랑하게 되셨죠.” 플랫은 “키가 큰 금발의 어머니가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때 한국 사람들이 놀라워했던 모습이 기억난다”며 “2008년 이모, 삼촌, 사촌들과 함께 아펜젤러-노블 박물관 개관을 축하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었다”고 떠올렸다. 그는 오랫동안 음악 교사로 일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뉴저지/글·사진 임석규 기자 sk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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