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인먼·왓슨·세이건…
결국은 호기심이 만든 승리
위대한 과학자뿐만 아니다
호기심 없는 인류는 생존 불가능
그런데 한국 사회는 지금
호기심과 열정 가치 무시하고
한 방 좇는 사람들 허세만 가득
이대로는 희망을 찾기 어렵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발견하여 1962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제임스 왓슨이 자서전에서 마치 노벨상을 타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 듯이 묘사했지만, 그와 함께 노벨상을 받은 후에 평생을 분자생물학 연구에 몰두하여 신경과학의 새로운 문까지 열어젖힌 프랜시스 크릭의 인생을 보면 왓슨의 회고는 일종의 드라마틱한 과장이다.
크릭이 사망한 다음 날, 그가 전날까지 출근했던 연구실의 사진이 공개된 후 전 세계 과학계는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 책상 위에는 그 전날까지 메모한 흔적이 있는 연구 논문들과 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진짜 과학자들은 죽기 직전까지도 호기심을 버리지 않는다. “나에게 신을 믿으라고 하지 마세요. 나는 이 우주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을 뿐입니다”라며 임종을 맞았던 위대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마지막 고백도 똑같은 맥락이다.
양자전기역학에 관한 탁월한 업적으로 1965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리처드 파인먼이 상을 대하는 태도도 똑같았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이미 상을 받았어요. 발견했으니까요. 그리고 사람들이 내 발견을 활용하는 모습을 보면 기쁘죠. 이것이 진짜이지 노벨상의 영예는 그저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일갈했다. 호기심은 그들의 본질이다.
과학자들뿐만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탁월한 업적을 낸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도 한결같이 호기심에서 출발하여 여전히 호기심으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기 며칠 전에 한 인터뷰를 보라. “저는 언제나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그리고 산다는 게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자꾸 생각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고민을 매번 다른 방식의 소설들로 다루고 싶어 했고요.”
물론 이런 위대한 지식인들은 호기심의 끝판왕이며 우리 같은 일반인과는 너무나 먼 얘기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호기심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나 있는 역량이 아니다. 사피엔스의 경우 다른 종들과 달리 너무 미숙한 상태로 아이가 태어난다. 직립을 하게 되면서 여성의 산도(태아가 나오는 길)가 좁아져 태아를 오랫동안 배 속에서 키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인류는 뇌도 말랑말랑하고 몸도 견고하지 못한 상태의 아기를 빨리 낳아 놓고 오랜 기간을 양육하는 방식으로 생활사를 진화시켰다. 그러다 보니 안전한 자궁 밖의 험난한 세계를 살아갈 추론 능력, 언어 능력, 사회적 지능 등을 일찍부터 발휘하게 만들 스위치가 필요했다(물론 필요하다고 진화하는 건 아니다).
호기심은 자궁 밖 세계의 수많은 자극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하는 스위치인 셈이다. 이 스위치는 배움을 즐거움으로 변환한다. 이게 없거나 망가져서 만약에 배움이 지루함이 된다면 인류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종이 되었을 것이다. “엄마, 아빠 이건 왜 그래?” 라는 아이의 질문에 기특해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아이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던 부모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호기심은 타고나는 것이며 사피엔스를 매우 특별한 종으로 만든 비밀 병기였다. 그런데 그 많던 호기심은 대체 어디로 갔는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관으로 전 세계 만 15세 학생들의 읽기, 수학, 과학 능력을 3년마다 평가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한국 학생은 성적 측면에서 거의 매번 전 세계 5위 안에 든다. 하지만 매번 거의 꼴등을 하는 두 항목이 있다. “수학과 과학, 재밌니?”(흥미), “수학과 과학, 어디다 써먹을 거 같아?”(가치). 더 충격적인 것은 우리와 성적이 거의 비슷한 핀란드 학생들은 주당 60시간 이상 학습하는 비율이 4%인데 반해 우리는 23%라는 사실이다(2017년). 즉, 우리 아이들은 재미도 없고 쓸모도 없다고 생각되는 공부를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하고 상위권 점수를 받는 학생들이다.
사실 아이만의 문제도 아니다. 마침내 노벨문학상을 배출한 한국의 성인 10명 중 무려 6명이 1년간 단 한 권도 읽지 않는다. 교육열이 최고라는 나라의 독서율치고는 믿기지 않는 수치다. 우리는 지금 호기심이 메마른 사회에 살고 있다. 내재 동기인 호기심이 사라진 사회는 직업, 직위, 집안, 인맥, 보상, 외모 등과 같은 외적인 결과값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사회로 변색되기 쉽다. 이런 사회에서는 호기심을 좇아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이 폄하되고, 한 방을 좇아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의 허세는 가득하다. 명태균씨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궤적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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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익 스타트업칼리지 석좌교수 진화학 및 과학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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