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는 48.56%, 이재명 후보는 47.83%를 득표했다. 격차는 불과 0.73%포인트, 총투표수 3400만표에서 차이는 24만7000여표였다. 무효표가 30만표로 두 후보의 격차보다 더 많았다. 이 결과를 운동경기로 본다면 승패가 확실하다. 동점이 아닌 이상, 두 팀 중 한 팀이 이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게임은 ‘민주주의’다. 민주주의에서 결과에 대한 해석은 열려 있다.
한국이나 미국에서는 아마도 승자와 패자를 금방 구분할 것이다. 그러나 유럽의 유권자들에게 이런 결과를 보여주면 해석이 좀 다를 수 있다. ‘비긴 거 아니야?’ 이렇게 답할 확률도 제법 높다. 아니 선거에서 비긴 게 어딨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하는 나라와 사람들도 있다. 민주주의는 승자독식이 아니라고 생각할수록 그렇다.
만약 우리가 이 선거 결과를 ‘국가 이성’이나 ‘시대 정신’, 혹은 루소식의 ‘일반의지’ 개념을 통해 이해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비겼다는 해석이 좀 더 분명해질 것이다. 집합적 의지로 모아진 국민의 뜻은,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기보다는 아직 결정을 못했거나 둘이 같이 잘해보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승자독식이 아니라 협력적 민주주의, 다원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정치를 이해한다면 더욱 그렇다. 연립정부가 일상화된 의회제 국가에서는 이런 생각이 오히려 지배적일 것이다.
‘우리는 대통령제라서 안 돼’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연구들은 대통령제 국가에서도 절반 이상의 정부가 연립정부의 형태로 운영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선결과가 박빙이거나 당선인이 과반을 득표하지 못했을 경우, 연립정부는 흔한 일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하지 않을 뿐이다.
대통령의 10%대 지지율은 그래서 민주주의를 무시한 대가다. 1%도 못 이긴 대통령이 100 대 0으로 이긴 것처럼 권력을 행사하니, 국민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10%대의 지지율로는 사실상 통치가 불가능하다. 과도한 권력을 행사한 권력자로부터 국민이 권력을 빼앗아버린 셈이다.
사실 이 비판은 문재인 정부에도 똑같이 해당된다. 지난 19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는 겨우 41.08%를 득표했다. 민주당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는데도 문 후보의 득표는 과반에 한참 모자랐다. 박근혜를 끌어내린 국민들조차 민주당과 문 후보 세력이 국가를 독점 운영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는 뜻이다.
당시 나는 촛불과 대선 전후의 여러 토론회에서 연립정부를 구성할 것을 주장했다. 그래야 ‘촛불 정부’를 자임할 수 있고, 실제로 통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봤다. 이것이 국민이 원하는 것이고, 그것을 따르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 정부 초기에 그것을 전혀 검토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들었다. 그러나 실현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는 문재인 정부였지, 촛불 정부는 아니었다. 촛불에 동의한 압도적 다수의 국민들 중에서 겨우 절반 정도만 문재인을 지지했다. 그 지지를 받고도 촛불 정부가 될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권력을 나누고 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문재인 정부는 ‘다수파 정부’가 될 수 없었고, 가장 의욕을 보였던 검찰개혁에 실패했으며, 그 과정에서 다음 대선후보가 나왔다. 정권 재창출 실패는 민주주의를 무시한 대가였다. 문재인 정부는 대선 결과를 충분히 민주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왜 촛불 국민이 지지한 여러 다른 후보들과 손을 잡지 않으면서 스스로 촛불 정부를 자임했는지,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다.
흔히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통령제 자체의 문제나 통치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민주주의를 할 것인가의 문제다. 지금 우리 체제에서도 승자독식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과거 대통령들이 ‘지지자의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던 것은, 신념이 아니라 현실감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통치에 필요한 지지율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승자독식 민주주의는 가장 덜 민주적인 민주주의다. 거의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뜻도 된다. 쉽게 선을 넘기도 한다. 지금이 그런 때다. 어서 금 안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관후 정치학자 |
이관후 정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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