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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 (금)

[이희경의 한뼘 양생]가을, 곰 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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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드디어 반이, 달이를 직관했다. 단풍철 주말이라 청주까지 가는 길은 밀렸지만, 몇년 동안 기다렸던 일이라 내내 마음이 들떴다. 다행히 행사 예정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가장 먼저 이 아이들을 보러 갔다. 한 녀석만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유유자적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누굴까? 반이? 달이? 둘은 형제지간이라 얼굴은 비슷하다. 다만 반이는 가슴무늬가 크고 짙으며, 달이는 좀 옅고 좁다. 맞다. 반이, 달이는 2018년에 구출되어 현재 청주동물원에서 살고 있는 사육곰이다.

사육곰이란 용어는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생물종 분류로는 반달가슴곰이지만, 행동이 민첩해 나무를 잘 타고, 꿀, 과일, 견과류 같은 식물성 먹이를 선호하며, 높은 지능을 가진 야생 반달가슴곰으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게 된 어떤 생물의 불행한 역사와 현재의 곤경을 동시에 표명한다. 그들은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약재로 쓰였던 웅담 때문에 처음에는 무분별한 사냥의 대상이 되고, 그다음에는 사육의 대상이 되면서 이제는 야생동물도 반려동물도 가축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렸다.

웅담, 말린 곰 쓸개. 무게는 고작 19g이다. 1981년 정부가 농가소득 목적의 곰사육을 장려한 이후, 주로 동남아시아나 일본에서 수입된 이 곰들은 평생을 배설물이 바닥에 떨어지도록 고안된 구멍 뚫린 2평 정도의 뜬장에서, 배합사료와 음식물 쓰레기를 먹으면서 살게 된다. 결국 사육곰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목숨을 걸고 탈출해서 바로 사살되거나 아니면 흔히 ‘정형행동’이라고 불리는 의미 없는 반복 행동을 하면서 서서히 미쳐가거나. 말 그대로 죽거나 나쁘거나!

2018년 강원도 한 사육 농장에서 곰 세 마리가 구조되었다. 원칙적으로 웅담 채취가 불법이지만 정부는 2005년 10년 이상 된 곰을 도축할 수 있게 규제를 완화했다. 2014년에 태어난 이들은 태어나서부터 5년간 1.2평의 좁은 곳에 갇혀 정량의 3분의 1밖에 안 되는 개 사료를 먹고 평균 몸무게의 2분의 1밖에 안 되는 상태로 살면서 우리 안을 빙글빙글 도는 정형행동만 하고 있었다. 그나마도 삶이 5년밖에 남지 않게 되었을 때 시민 3600명이 모금을 해서 이들을 구출한 것이다. 곰 세 마리에게는 반이, 달이, 곰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둘은 청주동물원으로 하나는 전주동물원으로 갔다.

구출된 사육곰은 야생으로 돌려보낼 수 없다. 사육곰 어미에게서 태어나 젖도 떼기 전에 어미와 격리되어 인공적으로 길러진 이들은 야생에서 살아가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말을 바꾸면 구출된 사육곰에게는 생크추어리나 동물원 같은 인위적 환경과 ‘행동 풍부화 프로그램’ 같은 인위적 돌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반이, 달이를 구출한 이후 청주동물원에서는 사육곰들이 자기 종 특성에 맞는 감각과 신체 능력, 행동 패턴을 되살릴 수 있게 나무 구조물을 만들고 그물침대를 걸고 곳곳에 먹이를 숨겨놓는 일 등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반이, 달이는 철창에 붙어서 흙 위로 한 발을 내딛는 것조차 잘 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점점 행동반경이 넓어지더니 어느 날 스스로 나뭇가지를 주워 자신의 잠자리인 ‘탱이’를 만들었다고 한다. 아, 곰탱이! 새삼 신기했다. 아직 전국 18개 농장에 279마리의 사육곰이 살고 있다. 우리는 사육곰을 반달가슴곰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우리는 사육곰의 불행한 역사를 다종공동체 구성이라는 역사로 새로 고쳐 쓸 수 있을까?

이날 나는 반이, 달이를 만나러 온 다른 시민, 농인 대안학교 학생들과 함께 행동 풍부화 먹이 만들기 작업을 했다. 늙은 호박에 이런저런 장식을 하고, 호박의 가운데를 파서 사과, 감, 방울토마토, 호두, 메추리알, 땅콩, 당근, 고구마, 굼벵이, 밀웜 등을 넣어서 곰에게 가져다주는 것이다. 일부 먹이는 곰이 킁킁 냄새를 맡으면서 찾아보라고 낙엽 밑에 꼭꼭 숨겨놓기도 했다. 햇볕은 따뜻했고, 아이들은 깔깔거렸고, 곰과 숨바꼭질하는 기분이었고, 음성언어와 수어가 공존했다. 아름다운 곰 소풍이었다.

경향신문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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