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의 돌아보고 내다보고] 18 _총리법 제정의 필요성
대통령은 엿장수 맘대로 하는 데다 ‘샌님만 섬기는 나귀’처럼 하고, 총리는 ‘오래 해 먹은 면주인’처럼 그의 비위를 맞춘다. 멋대로 대통령-면주인 총리 체제로 국정이 잘 될 리 만무하다. 대통령이 권력 중독, 목표 과잉에 빠지지 않게 총리가 견제할 수 있으려면 그에게도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덕수 국무총리가 지난해 9월25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
한덕수 총리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대인이시다. 제일 개혁적인 대통령이고.” 맙소사! 그 대통령 부인의 평가는 다르다. “우리 남편은 완전 바보다. 내가 다 챙겨줘야지 뭐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지, 저 사람 완전 바보다.” 아뿔싸! 완전 바보와 개혁 대인, 어느 쪽이 진실에 부합하는진 모르겠으나 여론조사를 보면 국민 생각은 후자 쪽인 듯하다. 그렇다면 한 총리의 평은 요즘 미국에서 새롭게 쓰이는 ‘베이스드’(based)란 형용사가 제격이다.
총리가 윤 대통령을 극찬하는 이유는 뭘까? 잘나가는 관료로서 역대 대통령을 가까이서 지켜본 경험에 따른 비교 평가일 수 있다. 역사를 보면 유능한 지도자가 국민들에게 욕을 먹는 사례가 적지 않으니 윤 대통령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 있으랴. 총리가 ‘인간 방패’를 자임했을 수도 있다. ‘지우’(知遇)란 잊힌 단어가 있다. 남이 자신의 인격이나 재능을 알고 잘 대우한다는 뜻이다. 지우를 입은 총리가 그에 대한 보은으로 ‘봉창 두드리는’ 극찬을 했다면 이런 사탕발림에 능숙한 ‘처세 총리’의 존재가 현 정부의 위기를 낳는 하나의 원인이다.
국회에서 하는 대통령의 시정연설은 국정의 방향과 내용을 국민에게 책임 있게 보고하고 설명하는 의식이다. 미국 대통령의 연두교서(State of The Union)가 그렇듯 대통령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이자 싫어도 감당해야 하는 의무다. 그래서 2013년부터는 대통령이 직접 하는 민주적 관행이 정착했다. 이번에는 대통령이 총리에게 미뤘다. 익숙한 ‘대독 총리’의 재연이다. 대통령은 엿장수 맘대로 하는 데다 ‘샌님만 섬기는 나귀’처럼 하고, 총리는 ‘오래 해 먹은 면주인’처럼 그의 비위를 맞춘다. 멋대로 대통령-면주인 총리 체제로 국정이 잘 될 리 만무하다.
총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대통령이 엇길로 새거나 일탈에 빠지지 않도록 견제하는 것이다. 헌법 정신도 그렇지만, 과거 역사를 보면 재상들이 아닌 건 아니라고 하며 왕의 독단을 단호하게 막아설 때 나라가 태평했다. 당 태종의 태평성대도 위징의 직간과 반대로 가능했다. 왜 이런 견제, ‘미스터 노맨’(Mr. no man)이 필요할까?
그가 누구든 어떤 자리든 권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에 취하기 쉽고, 그로 인해 망조가 들기 때문이다. 전체 국민이 표로 선출한 유일한 공직자라는 정통성에다 법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주다 보니 대통령은 ‘선출된 왕’으로 불리기도 한다. 조영호 교수에 따르면, 대통령은 국가와 정부를 경영하는 데 4가지 수단을 보유하고 있다. 인사·예산 등의 행정 대권, 검찰·경찰 등 권력 기구, 여론에 대한 호소력, 여당의 협력 등이다. 그런데 비유컨대, 권력이 산술급수적으로 강해질수록 잘못될 가능성은 기하급수적으로 커진다. 권력욕을 부린 대통령은 거의 예외 없이 위기에 빠졌다.
대통령이 권력 중독, 목표 과잉에 빠지지 않게 총리가 견제할 수 있으려면 그에게도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 헌법을 제·개정할 때의 의도와 달리 대통령이 총리를 가볍게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도 제도적으로 취약한 탓이다. “한국 헌법은 대통령을 정부의 수반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국무총리를 자의적으로 해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국무총리의 권한이 아무리 확장된다 하더라도 제도적으로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권위뿐 아니라 정부 운영의 법적 권한에도 도전할 수 없다. 대통령은 헌법상 정부 수반으로 행정권을 독점하고 있고 (…) 아무리 국무총리가 자신의 제도적 자원을 동원하려 해도 해임권에 의해 바로 무력화된다.”(한상익, ‘정치적 자원과 국무총리의 권한 및 역할의 변동’)
현행 헌법의 총리 관련 조항을 보다 분명하게 규정하는, 즉 국무총리의 지위와 권한을 법으로 명확하게 해놓으면 고비용이 드는 헌법 개정 없이도 제왕적 대통령제를 크게 완화시킬 수 있다. 지난 20대 국회에서 ‘국무총리의 지위 및 권한에 관한 법률’을 제안한 바 있다. 아쉽게도 깊이 있게 논의하지 못한 채 폐기했으나 눈여겨볼 대목이 적지 않다.
제안된 총리법의 포인트는 두가지다 우선 총리가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여러 장치를 두었다. 법안에 따르면, 국무총리는 국무위원 임명 제청을 문서로 하고 대통령도 이를 거부할 경우에는 문서로 해야 한다. 대통령이 거부한 국무위원 후보자를 다시 임명 제청할 순 없고, 국무총리의 제청에 의하지 않으면 대통령의 국무위원 임명은 무효다. 이렇게 되면 헌법에서 정한 제청권을 총리가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 해임 건의 절차도 담겨 있다. 총리는 국무위원의 해임을 문서로 건의할 수 있다. 대통령이 이를 거부할 수 있는데, 이 경우엔 총리에게 문서로 통지해야 한다. 대통령이 국무위원을 해임하고자 할 경우에는 총리의 의견을 들어 이를 반영해야 한다. 이때 총리는 의견을 문서로 제시해야 한다. 만약 대통령이 총리의 의견을 들어 반영하지 않고 국무위원을 해임하면 그 효력을 잃는다.
내각 통할에 대한 내용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국무총리는 각 부처의 행정을 지휘·감독함을 명시했다. 국무총리가 부처의 위법·부당한 명령이나 처분을 중지 또는 취소하기 전에 시정명령을 할 수 있으며, 시정명령을 받은 부처의 장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에 따라야 한다. 부처의 장관이 고위공무원의 임용을 제청할 때는 사전에 국무총리와 사전 협의해야 한다. 총리의 부처 간 업무조정권도 명시했다. 국무총리는 부처 간 정책에 대한 이견 및 갈등과 주요 국정 현안에 관한 업무를 직권으로 조정하거나 국가정책조정회의에 회부할 수 있고, 장관들은 이를 따라야 한다. 총리는 직권 조정 또는 결정을 지체 없이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승인을 받아야 한다.
국가정책조정회의는 국무총리가 주관하는 회의로서 부처 간 정부 정책에 대한 이견 및 갈등과 주요 국정 현안에 관한 업무를 조정·협의하기 위한 기구다. 정부 예산안, 국회 제출 법률안 및 그 밖에 국민의 생명·신체·재산·안전과 관련된 정책 등의 조정·협의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반드시 국가정책조정회의에 회부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헌법 82조의 부서(총리와 국무위원이 함께 서명)와 관련해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 총리가 부서를 거부할 수 있도록 했고, 그의 부서가 없는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는 효력이 없는 것으로 했다.
총리법의 또 다른 포인트는 총리 임면 절차를 강화한 점이다. 총리가 국회와 정부 간 가교 역할을 하도록 국회가 총리 후보자를 추천할 수 있게 했다. 총리 후보자 추천은 재적 3분의 1 이상 발의와 과반수 찬성으로 의결한다. 대통령은 국회가 추천한 후보자를 거부할 수 있는데 그럴 경우 그 사유를 문서로 국회에 보내야 한다. 총리 임기는 2년으로 하고, 중임할 수 있으나 대통령 임기가 종료되면 함께 물러나도록 했다. 총리의 권한이 세진 만큼 국회와 대통령이 그를 견제할 수 있게 했다. 대통령은 국회의 동의를 받아 총리를 해임할 수 있다. 국회는 국회대로 국무총리 해임을 건의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의 총체적 혼란을 해결하려면 여러 조치가 필요하다. 그 해법 중 하나로 국회에 의한 총리 추천과 총리법 제정을 검토해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탄핵이나 임기 단축 등의 극단적 경로를 피할 수 있다. 대통령이나 여야 정당 모두 내키지 않거나 성에 차지 않겠지만 위기 해소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적 제도 개선을 함께 이뤄내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참, 서두에서 언급한 베이스드(based)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구애받지 않고 용감하게 자신만의 생각을 말하는 것으로 인정할 때 쓰는 말’이다. 온라인에서 정치적 은어로 사용하고 있다. 오글거리는 말을 눈치 없이 할 정도로 한 총리는 참 용감한 사람이다.
이철희 | 방송에서 정치평론을 하다 정치에 나서 20대 국회의원, 문재인 정부 마지막 정무수석을 지냈다. 2020년 ‘대통령 탄핵 결정요인 분석: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과정 비교’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인자를 만든 참모들’ ‘정치가 내 삶을 바꿀 수 있을까’ 등의 책을 냈고, ‘진보는 어떻게 다수파가 되는가’ 등의 역서가 있다. 우리 정치가 어쩌다 이렇게 나빠졌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야 나아질 것인지 등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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