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튀’는 말 그대로 의뢰인의 선수금만 받아 챙긴 뒤 일체의 조사 없이 잠적하는 행위다. ‘양방’은 의뢰인과 조사 대상자 양측에게서 돈을 뜯어내는 것으로 한때 불법 스포츠 도박판에서 모든 경우의 수에 판돈을 건다는 ‘양방 베팅’에서 유래됐다. 보이스피싱을 의미하는 ‘핑’은 더 집요하고 심각하다. 조사 과정에서 상대의 약점이 될 만한 증거를 확보한 후 협박 수단으로 삼아 달돈을 챙기듯 조사 대상자로부터 주기적으로 금전을 요구하는 수법이다.
“업계에 양아치가 너무 많다.”
서울 영등포구의 ‘더믿음’ 탐정사무소 김모(31)씨. 그는 취재 과정에서 유일하게 업체명 공개에 응했다. 안덕관 기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6년 차 탐정 김모(31)의 쓴소리다. 성심성의를 다해 의뢰 내용을 수행하는 탐정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2020년 탐정이란 명칭을 달고 영업활동이 가능해지면서 업계의 물이 흐려졌다고 그는 지적한다. 채권 추심과 도·감청, 청부 폭행 등을 주업으로 삼은 불법 심부름센터가 과거를 숨기고 멀쩡한 탐정 업체인 양 홍보하는 경우가 늘었기 때문이다.
출신이 불분명하거나 조직에서 밀려난 조폭 출신이 신분을 숨기고 해결사 노릇을 자처하는 사례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탐정이란 명칭에서 불법이 내포된 듯한 뉘앙스가 묻어나는 이유다. 결국 아무나 뛰어들면서 간절한 심정으로 탐정 업체를 찾는 의뢰인만 졸지에 피해를 보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
탐정 업계의 은어 ‘먹튀, 양방, 핑’
“처음 의뢰를 맡긴 업체에 700만원 정도 뜯겼다.” 12월 14일 밤, 서울 영등포의 ‘더믿음’ 탐정사무소에서 문성현(가명·48)씨가 털어놨다. 필라멘트 수명이 다해 가는 형광등 아래 그의 낯빛은 어두웠고 눈 밑이 도드라져 보였다. 전주에 사는 그는 한 달 전 전봇대에 붙은 탐정 업체의 전단을 보고 연락을 걸었다. 배우자의 불륜이 의심되다가도 신경이 예민한 탓일 거라 고개를 젓던 게 벌써 6개월째. 그날만큼은 쉽게 털어내지 못했다.
“사무실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시내 한 카페에서 만났다. 사정을 듣더니 금방 해결되는 건수라고 했다. 조사 기간은 2주, 선수금 300만원을 요구했다.” 높은 액수에 기가 막혔지만 “이혼소송은 남자가 불리하다. 상대 약점이 없으면 양육권을 박탈당할 수 있다”는 업자의 회유에 넘어갔다.
하지만 진전이 없었다. 최소한 배우자를 조사하고 있다는 사진이라도 보내 달라고 하면 “기다리시라”는 답장만 왔다. 그리고 기한이 다가오자 배우자가 청소 용역으로 일하는 건물 사진을 보여준 뒤, “거의 다 확보했다. 2주만 더 연장하자”며 300만원을 추가로 청구했다. 다만 업자는 건물 내 학원 원장이 수상하다고 단서를 붙였다.
그 말에 넘어간 게 화근이었다. 2차 조사 비용에 경비까지 더해 400여만원을 입금했다. 다음 날 탐정에게 전화하니 없는 번호라는 기계음이 들렸다. 직후에 벌어진 부부싸움에서 배우자는 “미행을 붙였느냐”고 쏘아붙였다. 문씨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양방에 당하신 것 같다.” 탐정 김씨가 말한다. 문씨로부터 돈을 가로챈 업자가 배우자의 불륜 증거를 확보한 뒤 이를 빌미로 배우자에게 접근, 상당한 액수를 또다시 뜯어냈을 거라는 추론이다. 실제로 김씨는 전주로 출장을 떠나 단 이틀 만에 배우자와 학원 원장의 외도 증거를 잡아냈다. 청소 용역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을 하고 배우자가 출근하는 데서 조사는 사실상 끝난 셈이었다.
하지만 이후 문씨 부부가 이혼소송에 돌입했다는 소식은 전해진 바 없다. 집구석에는 꺼림칙한 기운만 남았다.
탐정 업체를 가장한 보이스피싱 조직으로부터 협박당한 30대 후반 남성이 제시한 사진. 경기 수원에서 그와 불륜 상대가 들른 모텔이 촬영돼 있다. 사진 취재원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탐정업을 보이스피싱 범죄의 영업 창구로 악용하는 사례도 있다.
지난 11월 말, 취재 과정에서 만난 경기 의정부의 탐정 심모(38)씨는 “도저히 방법이 없다”면서 의뢰인을 돌려보낸 참이었다. 말인즉슨, 김포에 거주하는 30대 후반 남성이 사무실을 찾아왔는데 불륜을 저지른 당사자였다. 그런데 며칠 전 상간녀와 수원역 인계동의 저녁거리를 걷는 사진부터 지역 모텔에 드나드는 영상까지 다량의 카카오톡 메시지가 익명의 대상으로부터 전송됐다.
가장 충격적인 영상은 항공 샷 구도로 그들이 숙박한 모텔 창문을 촬영한 것이었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어둔 탓에 가운을 입고 침대에 누운 그와 상간녀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계속)
30대 상간남을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든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누구였을까. 우리나라에는 ‘공인 탐정’이 없지만, 여전히 뒤에서 활동하는 탐정들의 세계가 존재합니다. 풍문으로만 떠돌던 탐정의 실체가 궁금하시다면, 아래 링크에서 남은 이야기를 확인해 보세요.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7555
━
'탐정의 모든 것' 또 다른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어느날 차에 샤넬백 숨긴 아내…요양원 원장과 밀회 대가였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2478
접대부와 ‘두집 살림’ 사장님…공사 당한 뒤 복수전 말로’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5912
룸살롱 사장 열받아 의뢰했다, 여성 2명 태운 ‘카니발’ 정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0749
“차 한대로 수천만원 번다”…BMW 뽑자 악몽 시작됐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08928
교사 찾아가 “일진 다 끌고 와”…탐정 푼 엄마의 ‘학폭 복수’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14165
▶ 중앙일보 / '페이스북' 친구추가
▶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