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영이 인수한 ‘52년 전통 문예지’
소량 찍어 도서번호 받았지만 보류
본지가 입수한 '문학사상' 재창간호(619호) 표지. 부영 측 설명에 따르면 "시안 중 하나"이지만, 한 권의 책으로 인쇄돼 ISBN(국제표준도서번호)도 받았다. 온라인 서점에는 '판매종료'로 떠있다. /문학사상 |
본지 취재 결과, 고승철 문학사상 사장과 편집부는 지난달 모두 사임했고 현재 복간 여부는 불투명해졌다. 부영 측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검토 단계”라고 했다. ‘문학사상’은 지난달 1일 재창간호(619호)를 소량(20부) 찍어 ISBN(국제표준도서번호)까지 발급받았다. 본지가 입수한 재창간호를 보면 황주리 화백이 표지화를 그렸고 ‘영원한 청년 작가’라는 제목으로 소설가 황석영 인터뷰를 실었다. 소설가 한승원의 축사를 비롯해 권지예·김별아·김숨·이경란의 단편소설, 복거일의 장편소설, 시인 강신애·강은교의 신작 시도 담았다. 본문만 472쪽에 달한다. 이에 대해 부영 관계자는 “시안 중 하나일 뿐”이라고 했다.
‘문학사상’은 1972년 창간 이래 올해 4월호까지 통권 618호를 발행했다. 경영난으로 지난 5월부터 무기한 휴간 상황에 처했다. 이런 가운데 이중근 부영 회장이 기업의 메세나 활동(문화 예술 지원) 차원에서 인수 계획을 밝혔다. 이 회장이 사비를 들여 설립한 우정문고가 잡지를 출간하기로 하고 직접 발행인을 맡았다. 이후 10월 재창간을 목표로 했지만 결국 발간이 무기한 연기된 것이다.
1972년 10월 '문학사상' 창간호(왼쪽)와 휴간 전 지난 4월 마지막으로 출간된 618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문학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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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이라고 했지만 인쇄까지 마친 책이 배포되지 않은 배경을 두고 “인터뷰가 실린 황석영의 정치적 성향을 이 회장이 부담스러워했다”는 말도 나왔다. 한 문단 관계자는 “부영 측이 정치적인 논란을 우려한 것 같다”고 했다. 출간에 참여한 한 관계자는 “이 회장과 편집부의 견해 차이가 컸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했다.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 잡지 발간 무기한 연기의 계기가 됐다는 시각도 있다.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이 회장은 한국의 노벨 문학상 작가를 배출하겠다는 큰 뜻을 갖고 인수했는데, 한강 작가의 수상으로 김이 샌 것”이라고 했다. 이 회장은 재창간사에서 “’문학사상’은 필자에게 최고의 원고료를 지급하고, 우정문학상을 제정해 최고의 상금을 준비하도록 하겠다. ‘문학사상’에 실리는 작품들이 문학사에 길이 남고 우정문학상을 받은 작품이 노벨 문학상을 받는 날을 고대한다”고 썼다. 이 관계자는 “기업 입장에서는 목표가 사라지고 나니 적자가 나는 문예지를 운영할 필요가 있는지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중인 것 같다”고 전했다. 원고를 보낸 문인들은 허탈해하고 있다. 재창간호에 기고한 한 작가는 “주문이 들어와서 요리했더니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 문학판 ‘노쇼(no-show)’”라고 지적했다.
2023년 제26회 동리·목월상 심사평, 수상자 소감, 수상자의 자전 소설 및 신작 시 등이 실린 '동리목월' 잡지. 통상 시상식에서 배포되는 이 잡지는 지난해 시상식이 치러지지 않으면서 공식적으로는 배포되지 않았다. /독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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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들이 애꿎은 피해자가 되는 일은 또 있다. 지난해 제26회 동리·목월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소설가 윤순례와 시인 조창환은 상금(각 6000만원)을 받지 못했다. 이 문학상은 경상북도, 경주시, 한국수력원자력(상금 협찬)이 주최하고 동리·목월기념사업회가 주관한다. 윤 소설가는 동리·목월기념사업회에 상금 지급 청구 소송을 걸어 지난 9월 승소했다. 그는 “지난해 11월 수상 통보 전화를 받았는데, 나흘 앞두고 시상식이 연기됐다는 얘길 들었다”며 “이후 시상식은 치러지지 않았고 결국 상금을 못 받았다”고 소송을 진행한 이유를 밝혔다. 서울서부지법은 “사업회가 소설가에게 상금 6000만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약정에 따라 한국수력원자력이 상금을 협찬한다는 점도 판결문에 명시됐다. 경주시 관계자는 “수상자 선정 과정에서 운영상의 문제가 있었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전후로 ‘K문학’이 세계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지만, 국내 문단 속사정은 겉보기만큼 화려하지 않은 실정이다.
[황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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