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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0 (수)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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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22년 10월29일 낮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열린 ‘제2회 친족성폭력피해자 생존기념축제-생존자랑대회’에서 참가자들이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적은 손팻말을 들어 보이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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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정 |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예능 프로그램 ‘무쇠소녀단’을 빠져들어 보았다. 네명의 여성이 넉달 뒤 열리는 철인3종 대회에 출전하기로 한다. 한 사람은 수영, 한 사람은 자전거 타기를 아예 못한다. 한 사람은 체력이 안 좋고 한 사람은 부상이 잦다. 아무리 해도 물에서 안 나가고, 자전거에서 넘어질 때마다 누군가 외쳤다. “엔딩은 정해져 있어.” 정해진 엔딩, 괜찮은가? 그 엔딩이 나의 성취, 우리의 성장이라면, 최선을 다하도록 권한과 자원이 주어진다면, 그 엔딩을 내가, 우리가 선언한 것이라면.



11월19일 국회 의원회관 제8 간담회실에서는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공소시효는 형사소송법상 일정 기간이 경과하면 범인 처벌을 면제하는 제도다. 현행 성폭력도 적용된다. 강간·강제추행죄는 10년,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는 7년. 공소시효는 2007년 전반적으로 기간이 상향된 바 있다. 또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 특례조항이 생겨 미성년 피해자의 경우 성년이 된 뒤부터 기산하고, 13살 미만이나 장애가 있는 피해자의 경우에는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 것 등으로 바뀌었다.



공소시효는 왜 존재할까? 공소시효 제도에 대한 헌법재판소 합헌 결정(94헌마246, 95헌마8)을 보면 오랫동안 국가가 소추권의 행사를 게을리했는데도 그 불이익을 오로지 범인만 감수하여야 하면 부당하고, 시간의 경과에 따라 범죄의 영향력이 미약해지고, 범인 스스로 처벌받은 것과 비슷한 상태가 된다는 것, 피고인의 생활안정 보장 등이 주요 논거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범죄에 대한 사회적인 인지와 압박이 존재했다는 전제다. 이러한 전제는 성폭력에 대해서, 친족 성폭력에 대해서도 유효할까?



친족 성폭력은 4촌 이내의 혈족이나 인척, 동거하는 친족으로부터의 성폭력이다. 친부, 의부, 조부, 친형제, 의붓형제, 삼촌, 사촌, 형부, 시부모가 가해자로서 저지르는 성폭력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전체 상담 중 평균 15% 정도를 차지한다. 가정·가족 내의 위력을 가진 이가 성폭력을 저지를 경우 바로 신고를 할 수 있을까? 한국성폭력상담소 친족 성폭력 상담 중 53.3%는 공소시효가 이미 도과했다. 54.1%는 피해 이후 상담을 받기까지 10년 이상이 걸렸다. 30년 이상이 된 경우도 13.2%에 이른다.



가족·가정 내 폭력은 침묵의 구조화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가족 중 누구도 그 폭력을 발설하는 것을 환영하지 않고, 알아채지 않으며, 많은 피해자가 발화해도 믿지 않거나 부인하고, 믿는다 해도 잊기를, 덮기를, 조용히 지나가기를 요구한다.(김홍미리) 국가가 정해놓은 공소시효는 이를 공적으로 승인하고 있는 장치다. 한국 사회에서 법적 보호자를 떠나면 위험한 사람, 문제 있는 사람으로 규정되는 문화는 또 어떤가. 정상 가족이 없으면 다른 사회관계에서도 차별을 당하거나 낙인이 찍힌다. 가족 제도와 신분 제도가 하나로 묶여 있는 상황에서 ‘정상 가족’을 이탈하면 노동권, 생존권마저 취약해진다.(나영정) 친족 성폭력 피해자는 공소시효가 흐르고 있었음을 인지했을까? 충분히 스스로 선택한 종결일까? 친족 성폭력 범죄 영향력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미약해진 상태일까? 범인 스스로 사실상 처벌받은 상태가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정상 가족이라는 침묵 구조 속에서 경험과 사실은 봉인되었을 뿐, 무엇도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07년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위한 10만 서명운동의 제목이다. 그로부터 여러 해가 지나 22대 국회에서는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연장 혹은 배제안을 담은 개정안이 세건 발의되어 있다. 여전히 국회 내 검토의견은 보수적인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논의 과정에 피해자의 시간이 반영되기를 바란다. 성폭력처벌법 공소시효 특례조항에 친족 성폭력이 추가된다고 모든 문제가 끝이 아니다. 오히려 시작이다. 공소시효를 배제하자는 것은 수사기관과 소추기관, 사법부에 시간을 주어 언제든 마음먹으면 가해자를 잡아 기소하고 처벌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취약해졌던 피해자가 피해를 기억하고, 상처를 치유하고, 조금은 마음 편하게 고소 여부를 생각해볼 수 있도록, 가해자를 신고할 수 있는 단단한 결심이 서기까지 우리 사회가 다 같이 기다려주는 시간(김영서)이다. 엔딩을 스스로 정하고, 마음껏 최선을 다해 달려보고 멈춰보고 걸어보는 시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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