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3 (토)

이슈 미술의 세계

작가님, 강사님이라 불려도...무례와 모욕 견디며 사는 신세입니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미깡의 어쩌면, 인생 만화]
최다혜 '아무렇지 않다'

편집자주

스마트폰 화면으로 보는 만화가 일상인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가락 사이로 책장을 끼워가며 읽는 만화책만의 매력을 잃을 수 없지요. 웹툰 '술꾼도시처녀들', 오리지널 출판만화 '거짓말들'의 만화가 미깡이 한국일보를 통해 감동과 위로를 전하는 만화책을 소개합니다.
한국일보

최다혜 작가의 그래픽 노블 '아무렇지 않다'의 한 장면. 씨네21북스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출판계 일러스트레이터 ‘김지현’의 이야기


“작가님”이라 불리지만, 작업한 책이 나와도 ‘내 책’이라는 실감은 없다. 표지에 이름이 적혀있지도 않고 글 작가는 “제 책에 들어갈 그림을 그려줘서" 고맙다고, 선을 긋듯 말한다.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땐 내 작품이 바로 나올 줄 알았는데 생활비 때문에 외주 일을 하면서 개인 작업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다음 작업 의뢰가 들어왔는데 이번에도 ‘저작재산권 양도’ 조건이다. 내 그림의 권리를 출판사가 갖는 부당한 계약이지만 "다른 작가님들도 다 이렇게 하고 있다"고 하는 데다, 일이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프리랜서 입장에서 거절하기 쉽지 않다. 불안은 바퀴벌레의 모습으로 지현의 선잠을 거듭 비명으로 깨운다.

미학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강은영’의 이야기


“교수님”이라 불리지만, 비정규직 시간강사로서 곤궁한 생활에 지쳐있다. 강의를 마치고 시외버스와 만원 전철에 시달리다 옥탑방에 도착하면 이미 밤늦은 시간. 구두만 벗고 쓰러져 잠들었다 일어나 다시 강의 준비를 한다. 그렇게 일해도 생활이 빠듯해 '알바 사이트'를 들여다본다. 전임 교수가 되려면 박사 학위, 외국 학위가 필수라는데 은영은 석사 등록금도 채 다 갚지 못했다. 그래도 강의할 때만큼은 빛이 나는 은영의 얼굴. 종강 후 “최고의 강의였다"는 학생의 편지에 다음 학기도 힘을 내보자고 다짐하지만, 삶은 너무나도 무례하다. “강의 배정이 안 되신 걸로 따로 연락을 드리진 않아요.”
한국일보

아무렇지 않다·최다혜 지음·씨네21북스 발행·276쪽·1만6,500원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화가가 된 ‘이지은’의 이야기


일단은 “작가님”으로 불리지만 “근데 성함이 어떻게 되셨죠?”라는 말이 따라붙는 무명작가다. 공모전에 입상해 전시는 해도 아직 그림으로 돈을 벌지도, 창작지원금을 받지도 못하는 애매한 상태다. 벌어둔 돈은 다 떨어졌다. 화방에선 물감을 집었다가 내려놓고, 편의점 도시락을 들었다가 돈이 필요하다는 엄마의 전화에 컵라면으로 바꿔 든다. 내키지 않는 입시 미술학원 아르바이트라도 하려 했는데 그마저도 되지 않았다. 돈도 없으면서 왜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는지 자책하고 싶을 때마다 얼른 고개를 털고 붓을 다잡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지기만 한다.

노을, 작은 조각 불빛이 밝혀 주는 그래픽노블


최다혜 작가의 그래픽 노블 ‘아무렇지 않다’의 인물들이다. 이들의 일상을 좇다 보면 본인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는 이유로 턱없이 부족한 보상을, 불안한 고용을, 무례와 모욕을 견뎌야 하는 예술가의 현실을 마주할 수 있다. 2년에 걸쳐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거친 듯 따뜻한, 무심한 듯 섬세한 그림이 특히 매혹적이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채도가 낮은 가운데 이따금 노을이나 불빛의 작은 조각이 포착되는 순간은 아련하고 경이롭다. 삶이 그런 것일까. 대체로 어둡고 가끔은 환한. 그렇더라도, 삶이 원래 어둡더라도, 이 지독한 불안과 어둠 속을 더듬거리면서도 묵묵히 걸어가는 세 사람의 발치에 빛이 조금만 더 가까이, 조금만 더 환하게 비추기를 가만히 바라본다.

미깡 만화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