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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영어 쓰면 벌타 먹는 내기할까? [정현권의 감성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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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이코노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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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만에 찾은 골프장이라 감회가 새로워. 포근한 느낌이야.”

칠순을 넘긴 직장 선배가 경기도 여주 이포CC에 모처럼 왔다며 반가워했다. 30년 전 같은 부서에서 근무할 당시 선배가 찾았다는 골프장이어서 함께하는 필자도 덩달아 설렜다.

무엇보다 전국 골프장을 점령한 외래어 공해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해방감을 만끽했다. 우리말 배나루로 풀이되는 한자명 이포의 중의적 의미도 신기했다.

배가 닿는 나루,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나루 두 가지 뜻이다. 정작 한자로는 후자인 이포(梨浦)를 사용한다. 정감 있는 이름에 더해 지명을 골프장 명으로 사용했기에 금방 위치를 알게 된다.

골프장 모든 티잉 구역(Teeing area) 바로 옆에 한자로 된 사자성어를 새긴 표지석이 내내 생각하는 골프로 만들었다. 청운입지(靑雲立志)로 시작되는 한자 골프 명언부터 되새기며 18홀을 돌았다.

“이 골프장에서는 영어를 사용하면 1벌타씩 부과하는 게임을 해도 재미있겠어.” 골프를 하면서 영어를 쓰지 않기가 얼마나 힘든지 선배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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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 홀, 클럽, 미터, 야드, 우드, 아이언, 드라이버, 오비, 볼, 캐디, 프로, 마크, 슬라이스, 훅 등 영어를 섞지 않곤 문장 하나 만들지 못하는 게 골프다. 무심코 영어를 사용하다 몇 번 벌타를 먹고 주머니가 털린 다음엔 입을 꾹 다물게 된다. 손발 몸짓으로 클럽을 주고받는다.

필자는 우리말이나 지명을 딴 골프장 이름이 좋다. 우리나라에서 영어가 가장 많이 사용되는 분야는 3곳이다. 아파트, 골프장, 그리고 감기약이다.

힐스, 레이크, 마운틴, 캐슬, 파인, 밸리, 비치, 팰리스 같은 외래어 접두사나 접미사가 붙은 골프장은 전화나 말로 듣고는 표기나 뜻을 알 수가 없다. 어디에 위치한지는 더욱 모르고 연장자들은 현란한 이름에 정신이 혼미하다.

아리지골프장, 아름다운골프장, 남촌골프장, 라온골프장, 금강골프장, 자유골프장, 우리들골프장, 용원골프장, 송추골프장, 솔모로골프장, 해비치골프장, 동촌골프장.

이들 골프장은 쉽게 찾을 수 있고 친근하게 다가와 오래 기억된다. 아리지골프장의 아리는 아리따운 같은 우리말 앞에 붙은 아름답다는 의미이다. 아리지는 아름다운 땅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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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골프장을 만들 당시 순우리말로 작명하려고 캐디에게서 공모했다고 한다. 이 골프장 3개 코스명도 햇님 별님 달님 같은 우리말로 지었다.

남양주에는 현대자동차그룹이 만든 해비치CC가 있다. 해비치는 가장 먼저 해가 비치는 곳이라는 순우리말로 제주도에도 같은 이름으로 운영되는 골프장이 있다.

제주도에 나인브릿지라는 명문골프장을 가진 CJ그룹은 경기도 여주에도 해슬리 나인브릿지를 만들었다. 해슬리는 해가 솟는 마을을 뜻하는 해승리에서 따왔다.

같은 여주권에 소나무 군락지라는 뜻을 가진 솔모로CC, 전남 장성과 경기도 포천에는 푸른솔GC라는 우리말 골프장이 있다. 제주 서귀포시와 충남 아산에 각각 위치한 우리들CC와 아름다운CC는 한번 들으면 귀에 그대로 꽂히는 완전 우리말이다.

경기도 광주 남촌CC와 뒤이어 개장한 계열사 동촌CC도 토속화된 한자명 골프장으로 정감이 간다. 레주도의 라온골프장은 즐겁다는 뜻을 지닌 우리말 라온에서 따왔다.

1968년 개장한 명문 안양CC는 안양베네스트로 바꿨다가 2013년 다시 리노베이션을 거쳐 원래 이름인 안양CC로 돌아왔다. 다른 골프장들이 베네스트라는 이름을 많이 붙이자 같은 급으로 취급받기 싫다는 의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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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나라 골프장 이름의 70% 이상이 외래명이다. 골프장 코스도 90% 이상 외래어를 붙였다.

남여주골프장의 가람코스와 마루코스, 누리코스는 우리말이다. 각각 강, 산, 들을 말한다. 1972년 생긴 경기도 양주의 레이크우드골프장(엣 로얄)은 36홀로 레이크와 우드 코스로 나뉘어 있다. 레이크 코스는 다시 물길과 꽃길, 우드 코스는 숲길과 산길 코스로 나뉜다.

오솔길 코스, 가온누리 코스, 별빛, 달빛 코스 같은 정겨운 우리말 코스가 더 친근하다. 한글로 이름 지어진 골프장이나 코스에 들어서면 포근하다.

영어 작명으로 인한 해프닝도 있다. 골프존이 인수한 전북 고창 골프존카운티선운의 전신인 선운산CC 원래 이름은 고창레이크선운CC였다.

개장하고 얼마 안 돼 선운산CC로 이름을 바꿨다. 당시 골프장 이름에 레이크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들어가던 터라 그냥 레이크를 붙였다. 그런데 골프장에서 눈을 씻고 봐도 호수를 찾을 수 없어 결국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경기도 여주와 양평이 만나는 남한강변 야트막한 산속에 새 보금자리마냥 들어앉은 이포CC에서 문득 떠오른 우리말 단상이다. 바람 한 점 없는 청명한 가을 울창한 노송으로 둘러싸인 수채화 같은 코스에서 옛 선후배가 만나 우정을 나눈 하루였다.

정현권 골프칼럼니스트/전 매일경제 스포츠레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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