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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화)

비틀비틀 독일을 보라… 금리 인하 망설이다 한국 경제 重病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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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대한민국]

헌법 개정해 부채 비율 제한 둔 독일, 유럽 주요국 중 성장률 꼴찌

1조 달러 대외금융자산 있다해도…상당액이 ‘국장’ 떠난 투자자 덕분

강남도 불꺼진 가게 속출… 지금 ‘재정건전성’ 운운 폼 잡을 때 아냐

조선일보

그래픽=백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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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출근길에 있는 매장 한 곳이 문을 닫았다. 차도는 차로 가득 차 있지만 가로변 상가들은 점점 비어가고 있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도 빈 상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나마 식당들은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이런저런 물건을 팔던 상가들은 급속히 문을 닫고 있다. 온라인으로 물건을 주문하는 것이 당연해진 시대의 모습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속도가 너무 빠르다. 문 닫은 가게들이 이어지는 거리를 걷다 보면 전체 취업자 가운데 자영업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19.7%까지 하락했다는 기사가 실감 난다. 자영업자 대부분이 중년이라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OECD 회원국 가운데 미국(6.6%), 독일(8.7%), 일본(9.6%) 등 선진국들의 자영업자 비율이 우리의 절반 이하에 불과하기 때문에 자영업자 비율이 더 낮아져야 한다고 쉽게 이야기하기 어렵다. 내수 경기를 보여주는 소비 동향 추이는 22년 2분기부터 24년 3분까지 10분기 연속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고, 앞으로 좋아질 조짐도 찾아보기 어렵다.

불 꺼진 가게들로 인해 컴컴해진 찬 바람이 부는 거리를 걷다 보면 27년 전 이맘때가 떠오른다. 1997년 11월 21일 우리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금융 지원을 요청했다. 보유 외환이 바닥났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대한민국은 크게 변화했다. 2024년 10월 외환 보유액은 4156억9000만달러에 이른다. 세계 9위 수준이다. 대외금융자산에서 대외금융부채를 뺀 순대외금융자산은 9778억달러로 1조달러에 육박하고 있다.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순대외금융자산의 가운데 상당 부분이 ‘국장(국내 주식시장)’을 포기하고 원화를 달러로 바꿔 ‘미장(미국 주식시장)’으로 향하는 투자자 때문이라는 점을 떠올려 보면 마음은 무거워진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24년 3분기 말 기준 국내 투자자가 보유한 외국 주식 규모는 1020억4000만달러에 달했고, 이 가운데 미국 주식이 918억4000만달러로 대부분을 차지했다. 24년 10월 기준으로 우리나라 투자자들은 인공지능(AI) 반도체로 유명한 엔비디아 주식 134억달러,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 주식 128억달러어치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 엔비디아의 인공지능, 테슬라의 자율 주행과 스타링크가 세상을 바꿔놓을 것이라는 기대로 꾸준히 주식을 매입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삼성전자는 폭락을 거듭하다가 10조원 자사주 매입이라는 카드를 꺼내면서 겨우 숨을 돌리고 있다. 많은 대기업의 자금 사정에 대한 부정적 소문들이 떠돌고 있고, 한동안 찾아보기 어려웠던 명예퇴직과 기업 매각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석유화학, 철강을 비롯한 많은 주력 수출 부문이 중국에 의해 빠르게 잠식되고 있지만 우리 기업들은 뚜렷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할 수 있고, 중국은 못 하는 영역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든 국민이 체감하고 있다.

조선일보

그래픽=백형선


내수 경기가 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기업들이 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 정부는 재정 지출을 확대하고 금융 당국은 금리를 인하해서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기본이다. 하지만 정부와 여당은 건전 재정 지표가 일정 수준을 넘지 않도록 법으로 강제하는 ‘재정 준칙’을 도입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재정 건전성이 무너져 신용 등급이 낮아지면 위기 시 대응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이 외환 위기 직후인 1998년 15%에서 2023년 50.4%까지 증가하였으니 경계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주머니를 졸라매면 가계와 기업이 먼저 쓰러지고, 국가 경쟁력은 약화된다. 독일이 그런 상황이다. 2009년 독일은 헌법을 개정해 GDP의 0.35%까지만 새로 부채를 조달할 수 있도록 제한했다. 15년이 지난 지금 독일은 유럽 주요국 가운데 가장 낮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2019~2023년 미국의 1인당 GDP가 6% 성장하는 사이에 독일은 오히려 1% 감소했다. 철도는 정시 운행을 못 한 지 오래다. 미래 산업에 대한 투자도 지연되고 있다. 무슨 일만 있으면 독일 사례를 꺼내 들던 지식인들은 정작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가계 부채 비율이 높아 기준 금리를 낮추기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24년 3분기 가계 부채가 1900조원을 넘어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는 기사를 접하다 보면 지금도 가계 부채가 급증하고 있다는 두려움이 밀려온다. 2006년 이후 우리나라의 가계 부채는 50~120조원씩 늘어났다. 하지만 2022년에는 7조원이 감소했고, 2023년에도 18조원 증가에 그쳤다. 올해 3분기까지 27조원이 증가했지만 지난 22년간 평균 증가액 62조원에 비하면 한참 낮은 수준이다. 부채를 죄악으로 생각하면 부채 감소는 반가운 일이지만 경제적으로 부채 감소는 경기 침체를 가져온다. 우리나라는 2025년부터 전체 인구의 20%가 65세인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할 예정이고 2028년부터는 경제활동인구가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경제활동인구 감소로 인한 내수 침체가 심화되고 다시 실업이 증가하는 악순환이 시작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무엇이든 해서 상황을 반전시켜야 하지만 주택 담보 대출 증가가 두려워 기준 금리 인하를 망설이는 사이에 우리 경제는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사이클에 진입하고 있다.

부채를 줄이고 재정 건전성을 높인다는 이야기는 멋있게 들린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멋있는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 재정 지출과 금리 인하라는 약을 얼마나 써서 침체의 늪으로 향하는 경제를 건져 올리고 비관적 분위기를 어떻게 돌려놓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우선이다. 약을 쓰지 않고 버티다 중병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부채라는 비뚤어진 뿔을 바로잡겠다고 한국 경제라는 소를 죽이는 그런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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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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